애국하는 데 남녀 구별이 없고 여성도 의병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조선 유생의 아내 윤희순(尹熙順·1860∼1935)이다. 윤희순은 16세에 외당 유홍석(畏堂 柳弘錫)의 장남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해 강원도 춘천에서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유생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의병 운동이 전개되면서 춘천에서도 의병 전투가 일어난다. 시아버지 유홍석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참전하게 되자 윤희순 역시 따라가겠다고 나선다. 시아버지가 간곡하게 만류하는 바람에 집에 남게 되면서 굶주린 의병들을 위해 곡식을 몽땅 털어 밥을 해먹이고 버선을 손질해주는 등 다른 방식으로 동참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뛰어난 웅변 실력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의병 운동을 지원하도록 독려해 군자금을 모아 댔다.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워주는 의병가를 짓기도 했다. ‘안사람 의병가’ 역시 그중 하나다. 노랫말에는 일제와 매국노들을 비판하고 안사람들도 의병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런데 1935년 큰아들이 체포돼 랴오둥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숨지는 사건이 벌어진다. 윤희순은 큰아들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너지고 만다. 한글로 ‘해주윤씨 일생록’을 짓고 1935년 8월 곡기를 끊은 지 12일 만에 생을 마감했다.
시골 유생의 아내이자 평범한 아이 엄마였던 여성이 3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의병장과 독립운동가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갔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조선 아녀자들은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규방 안에 얌전히 있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국에는 남녀의 구별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병 운동에 헌신했다. 최근 강원도를 중심으로 윤희순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의병 운동에 대한 투지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구한말 여성 윤희순의 의병가가 아직도 울려 퍼지는 듯하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왜놈 앞에 종이 되어/저 죽을 줄 모르고서 왜놈 종이 되었구나/슬프고도 슬프도다 맺힌 한을 어이할꼬/자식 두고 죽을쏘냐 원수 두고 죽을쏘냐.”
이후남 전주대 강사·국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