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박용곤 구단주.
1983년 장명부(1950~2005년)가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고 427.1이닝을 던져 30승(16패6세이브)을 올리자 각 구단은 재일교포 투수 영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30대 투수는 은퇴시점을 훌쩍 넘긴 노장중의 노장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장명부는 33세에 평균자책점 2.34라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OB 베어스(현 두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미래의 에이스로 꼽혔던 김일융을 영입하려고 시도했다. 고 박용곤 구단주(1932~2019년)가 요미우리신문사 최고경영진과 접촉한 끝에 트레이드 성사를 눈앞에 뒀다.
일본리그 커리어에서 장명부보다 앞서는 슈퍼 에이스를 품으려는 순간 삼성 라이온즈가 뛰어들었다. 삼성은 이건희 구단주의 주도로 이적료를 합쳐 5500만 엔이라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를 요미우리에 제안했다.
김일융은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삼성에 54승과 한 차례의 통합우승(1985년)을 선물했다. 그리고 두산은 오래도록 빛나는 ‘화수분 야구’를 얻었다.
4일 영면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생전 야구에 대해 극진한 애정을 보였다. 운영철학도 남달랐다.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고, 그 유산은 메이저리그 출신 선수들도 극찬하는 경기도 이천의 베어스파크로 결실을 맺었다.
1998년 OB는 이천의 맥주공장 기숙사를 개조해 핵심 유망주들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는 훈련장을 만들었다. OB 2군 선수들은 이 곳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프로야구 프리에이전트(FA) 시장이 폭등하기 시작한 2005년 두산은 이천에 베어스필드를 완성했다. 약 20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특급 FA 선수를 싹쓸이할 수 있는 돈이었지만, 두산의 선택은 미래였다.
나이가 들면서 휠체어를 이용했지만 표정만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 같았던 박 전 구단주를 이제 더 이상은 잠실구장에서 볼 수 없다. 그러나 혜안이 담긴 야구단에 대한 고인의 철학은 여전히 베어스 유니폼에 남아 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