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구릉-평야-해안의 지리적 열세 딛고 유명규-강상봉-김경운 등 유격전… 1919년 김포 만세운동으로 이어져
영국 데일리메일 프레더릭 매켄지가 찍은 구한말 의병들의 모습. 경기 김포 출신 의병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1919년 김포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의 항일정신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DB
‘김포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김포 출신 의병들은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병은 1894년 갑오의병이 효시가 됐고,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가 노골적으로 침략 의도를 드러내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1907년 8월 강화 분견대에서 봉기한 해산 군인의 일부가 토벌대를 피해 고양, 파주, 김포 등지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 의병운동은 본격화됐다.
김포 통진군 출신 강화 분견대 하사였던 유명규는 대표적인 의병이다. 1907년 7월 유명규는 분견대 군인들과 함께 강화의 무기고를 습격한 뒤 무기를 지역 주민에게 나눠주고 일본 순사와 일본인을 사살한다. 이들이 강화도를 장악한 뒤 8월 9일 강화 봉기가 일어난다. 정용대(대한제국군 정교 출신) 의병진에 참가한 강상봉은 1908년 경기 풍덕군에서 일본 순사대 8명과 전투를 치렀고, 박래병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속했던 김경운은 김포 통진군에서 군수품 확보에 나서다 일본군 수비대와 맞닥뜨렸고 교전 중에 체포됐다. 당시 김포군에선 “너희들은 일본인을 너의 조상으로 생각하느냐. 왜적을 죽이던 군도(軍刀)로써 마을을 피로 물들이리라”며 친일행위를 엄중히 경고하는 의병대장의 격문이 거리에 내걸리기도 했다. 침략자 일제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병들의 적개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