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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김정은의 무너진 꿈, 받아온 숙제

입력 | 2019-03-06 03:00:00


북-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5일 새벽 평양역에 도착한 김정은이 굳은 표정으로 명예위병대(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사진 출처 노동신문


주성하 기자

북-미 정상회담을 열흘쯤 앞둔 때, 북한이 이번 회담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내부 움직임 두 가지가 포착됐다. 첫 번째는 2월 중순 대외 무역 기관과 회사들에 대한 전면적 조사였다. 처벌하기 위한 조사는 아니었다. 각 회사들의 매출액과 거래 품목, 해외 바이어 등을 파악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 내부 관계자는 “제재 와중에 난립했던 작은 회사들은 정리하고 주요 무역 자원을 국가가 틀어쥐겠다는 의미였다”며 “북-미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주요 제재가 해제될 상황을 대비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같은 시기에 내려진 두 번째 조치는 해외 체류 4년 이상 외교관과 무역일꾼들에게 떨어진 귀국명령이었다. 지난해 11월 망명 후 잠적한 조성길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 대리 부부가 빌미가 됐다. 북한은 떠들썩한 탈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해외 체류자 철수나 임시 귀국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이번 일이 새로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단순한 조치는 아니었다. 그동안 지속된 대북 제재로 북한 해외 인력의 상당수가 귀국하면서 해외에 남은 무역일꾼들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베테랑들에 대한 철수 조치는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였다.

김정은이 열차 여행을 선택한 것도 나쁘지 않은 징후였다. 그가 비행기와 열차 중 불편한 열차 여행을 고른 것은 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선 김정은에게 열차에서 왕복 130시간 넘게 불편을 감수하고, 평양을 닷새 넘게 추가로 비워야 하는 무리한 일정을 요구할 만한 간부가 없다. 김정은은 열차를 타고 베트남을 가면서 중국의 발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 대륙을 3박 4일간 둘러보며 김정은은 북한의 미래를 이모저모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김정일이 준비해 간 보따리를 유일한 구매자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미국식 거래 계산법에 대해서 굉장히 의아함을 느끼고 계시고 생각이 좀 달라지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김정은의 심기를 전달했다. 언론에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이 이 정도라면 실제로는 김정은이 크게 대노했다는 뜻이다.

이제 김정은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미국식 거래 계산법을 공부하거나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어떤 결심을 해도 말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그의 심정으로는 새로운 길을 찾아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온갖 실험과 도발로 국제정치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핵 기술을 외국에 팔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의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중단을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선전하고, 김정은에게 온갖 찬사를 보내왔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최대 치적이 최대 수모로 바뀌는 상황을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선을 위해서라면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

새로운 길을 위해 북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계산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다만 지금 같은 강력한 제재가 지속된다면 북한은 머지않아 ‘제2의 고난의 행군’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경우 체제 붕괴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김정은의 권위는 북한 인민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낸 김정은은 곳곳에서 시체가 나뒹굴던 참혹함을 다 알지 못한다.

김정은은 17세 무렵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에게 “우리는 매일 이렇게 제트스키, 승마를 즐기는데 일반 인민은 뭘 하는가. 유럽과 일본에 가면 식량과 상품이 쌓여 있는데 북한에 돌아와 보면 아무것도 없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정은의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당시의 고뇌가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핵을 움켜쥐고 있는 한, 북한 인민이 제트스키와 승마를 즐기며 살 수 있는 날은 절대 오지 않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