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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윤승옥]여전한 진천선수촌… ‘패러다임 전환’ 가능할까

입력 | 2019-03-08 03:00:00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은 인류에게 1400년 이상 진리였다. 그러다 15세기 위기를 맞는다. 달력(율리우스력)에 열흘 이상의 오차가 생겼고, 장거리 항해가 늘면서 좌표 오류 문제가 불거졌다. 농사, 종교, 무역 등에서 차질이 생기면서 불만이 커졌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외쳤다. 지동설은 달력의 오류를 획기적으로 줄였고, 천체의 움직임을 보다 간결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천동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구 자전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지동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헤쳤고, 자신들의 오류는 정교하게 수정했다. 천동설은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까지 세우며 기득권을 지켜 나갔다.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끈질기게 옳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치열한 전투가 100년 넘게 지속된 뒤에야 지동설이 이겼다. 토머스 쿤이 명명한 ‘패러다임 전환’이 이런 것이다.

심석희 파문 이후 우리 체육계는 ‘패러다임 전환’을 외쳤다. 기존 체육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컸던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항이다. 쿤의 설명대로 패러다임 전환은 지난한 싸움이 꼭 필요한 모양이다.

우리 체육 발전의 핵심은 ‘합숙훈련’이었다. 1966년 태릉선수촌 개촌 이후 국가 차원의 합숙훈련 시스템을 운영해 왔고, 이는 스포츠 강국의 토대가 됐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바탕으로 선수촌 합숙훈련은 50년 이상 패러다임으로 인식됐다. 그러다 올 초 심석희 사태 등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합숙훈련 시스템이 성폭력 등 만악의 근원이고, 운동기계만 양산한다는 비난에 직면한 것이다.

여론이 심상치 않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소수 체육 엘리트가 아닌, 다수 국민이 행복해하는 선진국형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합숙훈련은 하지 않고, ‘스포츠 병영’으로 불리는 선수촌은 외부에 개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에 따른 국제대회 성적 추락은 상당 기간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심석희 사태 이후 두 달가량 흘렀다. 예상대로 기존 패러다임은 공고하다. 대한체육회 등 엘리트 스포츠 집단은 선수촌 합숙훈련을 고수하고 있다. 합숙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기숙’이라는 용어를 꺼내들었다. 대학 기숙사가 그렇듯 숙식을 ‘지원’한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이다. 물론 이에 맞게 외출, 면회 제도도 개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합숙을 폐지해 당장 내년 도쿄 올림픽 때 성적이 추락하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항변한다. 신치용 신임 진천선수촌장은 “누가 뭐래도 우리 스포츠의 경쟁력은 강한 훈련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자체 오류를 수정해 패러다임을 합리화하고, 상대의 결점은 파고드는 천동설의 대응과 닮았다.

반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문체부는 장관이 바뀔 조짐을 보이자 공무원들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시민단체 등도 막연한 방향만 있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외국의 사례가 어떠한지, 참고자료도 빈약하다. 싸움이 제대로 시작될지 의문이다.

심석희 사태 이후 국민 다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새 패러다임을 위한 노력들이 뒤따르지 않으면 전환은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면 문제는 반복될 것이고, 국민들은 스포츠를 외면할 것이다. 스포츠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윤승옥 채널A 스포츠부장 tou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