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성폭행 피해 여성들 울리는 法
하지만 가해자 처벌은 쉽지 않았다. A 씨는 “아영 씨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영 씨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면제를 탄 주스를 A 씨에게 건넸다’는 공범 진술이 나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A 씨는 강간 혐의로 2017년 5월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아영 씨의 고통은 한동안 계속됐다. 아영 씨에겐 동료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다. 아영 씨는 생업을 포기하고 한동안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아영 씨처럼 자신도 모르게 약물이 든 음료를 마신 뒤 정신을 잃고 성폭행을 당한 ‘약물 성범죄’ 피해자들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여러 장애물 앞에 서야 한다. ‘약물 성범죄’를 의심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서울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는 사건이 최근 4년간 계속 늘어 2015년 462건에서 지난해에는 861건이나 됐지만 가해자 처벌 사례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다.
피해자들이 약물 검출이 가능한 ‘골든타임’을 넘겨 경찰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경우도 많았다. 회식 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 뒤 정신을 잃고 선배 직원 B 씨와 성관계를 한 윤아(가명·여) 씨는 사건 발생 75시간 만에 B 씨를 강간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윤아 씨 혈액에선 수면제인 졸피뎀 성분이 나왔다. 같은 날 B 씨가 졸피뎀을 처방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하지만 법원은 “졸피뎀은 24시간이 지나면 혈액 속에서 사라진다”며 “사건 이후 졸피뎀을 투여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2016년 8월 B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약물이 검출되지 않더라도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였다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피해자들은 “사전에 성관계를 합의해 놓고 술기운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식의 가해자 주장을 반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신진희 변호사는 “피해자는 사건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몸 안에서 약물마저 검출되지 않는다면 가해자의 주장을 반증하기는 어렵다”며 “약물을 마신 피해자가 기억을 잃은 동안 몽유병 환자처럼 행동한 경우에는 더욱 피해를 주장하기 어렵다”고 했다.
몸 안에서 약물이 검출됐더라도 가해자를 곧바로 처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해자가 이 약물을 먹였다는 사실까지 입증돼야 한다. 자신의 집에서 지인에게 수면제가 든 딸기 주스를 몰래 먹인 뒤 성폭행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C 씨(33)에게 지난해 4월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피해자의 혈액과 소변에선 수면제 성분이 검출됐다. C 씨가 수면제를 처방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C 씨가 당시 갖고 있던 수면제를 주스에 탔다는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에 넘겨진 가해자가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범이거나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에서다. 57건의 판결 중 피고인이 ‘약물 성폭력’ 혐의로만 유죄를 선고받은 27건의 경우 11명에 대해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14명에 대해서는 징역 5년 미만의 실형이 선고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강간 혐의의 권고 형량을 기본 징역 2년 6개월에서 5년으로 정하고 있다. 현행법에서는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가중 처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