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운전 1000명을 살린다]<1> 국회서 잠자는 교통안전 법안
“아파트 단지 내 도로가 법적 도로가 아니더라도 모든 운전자는 횡단보도의 보행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1월 9일 대전지방법원 403호 법정. 심준보 부장판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어 나갔다. 2017년 10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단지 안 횡단보도를 건너던 김지영(가명·당시 5세) 양을 치어 숨지게 한 운전자 김모 씨(46)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었다. 심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횡단보도에서 피해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잘못이 무겁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씨에게는 금고 1년 4개월이 선고됐다. 일반적인 횡단보도 사망사고 운전자에 대한 형량보다 가벼웠다. 현행법상 김 씨에게 중과실 혐의를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1년 전 약속에도 달라진 건 없어
하지만 1년이 다 돼 가도록 달라진 건 없다. 사유지 내 교통사고도 도로교통법상의 도로에 준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 2년 4개월 전인 2016년 12월에 발의됐지만 아직 상임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등이 관련 법 개정을 위해 만든 협의체 논의는 겉돌고 있다. 경찰이 사유지(아파트 단지 안)에서의 도로교통법 위반 행위에 대해 어느 범위까지 개입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 양의 어머니 서모 씨(41)는 “국회에 묶여 있는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 더 이상은 우리 가족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호소하고 있다.
○ 1년 뒤엔 달라져 있을까
지난해 9월 부산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윤창호 씨의 친구 이영광 씨가 그해 11월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음주운전 사망사고 가해자의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의 처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동아일보DB
상습적인 음주운전 근절을 위한 시동잠금장치 도입과 과속 운전자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두 사안과 관련된 법안 역시 발의는 돼 있지만 1년 넘게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2017년 발의한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 도입을 위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에는 미국, 프랑스, 호주처럼 상습 음주운전자의 차량에 시동잠금장치를 장착하는 내용이 담겼다. 시동 전 음주 여부를 측정해 음주가 확인되면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국내외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됐는데도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며 법안을 계류시켰다.
‘보험 처리 만능주의’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제기돼 온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은 주승용 바른미래당 의원이 빨라야 올 상반기에 교특법 폐지 후 대체 입법안을 내놓을 예정이어서 20대 국회 내 처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대 국회 임기가 내년 5월 29일까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법안 발의 후 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1년뿐이다. 1982년 제정된 교특법은 종합보험에 가입한 운전자가 사망, 중상해, 중과실에 해당하는 사고만 내지 않았다면 형사책임을 묻지 않아 세계에서 유일한 ‘가해자 보호법’이라는 비판이 있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