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판사’의 한끼 | 가정불화의 척도 ‘통닭’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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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마치고 집 안에 들어서니 컴컴한 거실에 익숙한 양념냄새가 진동했다. 불을 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 양념통닭 상자가 놓여 있다. 군데군데 양념이 묻은 흰 상자 안에는 통닭 서너 조각이 황금 알처럼 반짝거렸다. 턱 아래 침이 고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먹다가 남겨놓은 것이다. (혹시 더 먹고 싶은데도 나를 위해 일부러 남겨놓은 것일까) 나는 양념이 찐득찐득하게 묻은 가슴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육질은 텁텁하고 양념은 필요 이상으로 강했다(나를 위해 부러 남겨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이 들어 맛있는 통닭을 먹은 기억이 없다. 통닭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내가 어릴 때 통닭을 남기는 것은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극장을 나가는 것만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 포함 많은 아버지가 월급날마다 3000원짜리 통닭을 직접 사들고 왔다. 검은 비닐봉투를 열면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그래서 ‘통닭’이다) 종이봉투가 나왔다. 봉투 안쪽에서부터 번진 기름얼룩 때문에 ‘시스루룩’이 돼 힐끔힐끔 속이 비쳤고 그 안으로 드러나는 통닭의 굴곡과 볼륨은 내 식욕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빵빵한 비닐봉투에 식촛물과 함께 담긴 ‘치킨 무’는 가슴살처럼 퍽퍽한 부분을 먹을 때 많이 먹힌다. 은박지를 열면 케첩과 마요네즈가 뿌려진 ‘사라다’가 들어 있었다. 소금은 그 당시 약국의 약봉지처럼 정사각형 종이를 대각선으로 여러 번 접은 것 속에 싸여 있었다. 후추가 적당히 섞여 있어야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다.
황토색도, 갈색도 아닌 통닭색
통닭의 꽃은 역시 닭다리다. 가장 두툼하면서 육질도 다른 어떤 부분보다 더 쫄깃쫄깃하다. 사람으로 치자면 똑똑하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양단의 모든 것을 갖춘 것이다.
어머니가 맨손으로 먼저 닭다리 하나를 잡고 뜯는다. 굵은 허벅지가 몸통에서 떨어져나가면서 통닭 껍데기에 지진이 일어나고 살과 힘줄이 툭툭 끊겨나간다. 마침내 어머니가 닭다리를 포핸드를 치는 테니스채처럼 들어 올리면 모두 그것이 누구에게 갈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닭다리를 누가 먹는지가 통닭을 둘러싼 사람들의 서열관계를 반영한다. 첫 닭다리는 어김없이 아버지 앞에 갔다.
문제는 두 번째 다리였다. 이것을 그냥 어머니가 먹으면 괜찮은데 그것을 굳이 맏아들인 내게 주곤 했다. 여동생은 속으로 서운했을 것이다. 혹자는 당시 여자가 닭다리를 먹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할머니에게선 “당시 집 ‘식모’가 닭다리가 너무 먹고 싶어 제사상에 올릴 닭다리 하나를 몰래 싱크대 밑에 숨겨놓았다가 냄새 때문에 들킨 적이 있다”는 말도 들은 적 있다. 가부장적 문화가 (사람은 물론 통닭) 뼛속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던 시절이었다.
날개 먹으면 바람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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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닭다리나 목보다 더 좋아한 부위는 껍데기였다. 씹을 때마다 바그락바그락, 와스락와스락 크래커 먹을 때보다 더 요란한 소리가 난다. 동물성 기름에 눅눅하게 젖은 데다 그 밑에 엷게 지방층도 붙어 있어서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다. 마늘통닭은 그 배 위에 기름에 절인 다진 마늘이 듬뿍 발려 있다. 마치 캔버스 위 유성물감처럼, 통나무집에 하다가 만 페인트칠처럼, 투박하고도 두껍게 묻은 마늘은 통닭의 거친 피부에 보호막을 입히고 윤기를 부여한다. 손이 트면 어머니가 잔뜩 발라주던 ‘안티프라민 연고’ 같이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하다.
이후 다양하게 발전된 통닭이 등장했다. 1980년대 중반 등장한 ‘멕시칸 양념통닭’은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처럼 선풍적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들어서는 춘천닭갈비가 유행하고, 2000년대에는 안동찜닭이 휩쓸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닭다리만 소복이 모아놓은 치킨도 나왔고, 최근에는 파와 함께 먹는 ‘파닭’도 나왔다. 그러나 그 옛날 통닭보다 나은 맛을 찾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면 아무하고나 밥을 한 끼 먹을 수도 있고 술을 한잔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하고나 (술안주도, 끼니도 아닌) 통닭 한 마리를 나눠 먹지는 않는다. 어지간히 친한 사이이거나,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통닭 한 마리를 가운데 놓고 다리를 양보해가면서 뼈를 발라내지는 않는다. 통닭을 함께 먹는 사이는 그만큼 특별한 것이다. 그것을 50대 주부 A의 이혼소송을 재판하면서 깨달았다.
“집구석에 통닭 한 번 사들고 온 적이 없어요.”
A는 본인 말로 큰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 시집 재산이 200억 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A는 재산분할금으로 그 절반인 100억 원을 청구했다. 남편 B는 부모로부터 목장을 물려받았다. 그 목장 안 대저택에 살면서 취미로 외제 지프를 타고 사냥을 다녔다. 이 정도로 B가 부자이긴 했지만 A가 생각하는 정도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B의 재산 자료를 찾아보니 도합 10억 원이 되지 않았다. 재산 대부분이 목장을 비롯한 임야였는데 이를 팔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었다. 그 자료를 보고도 A는 B가 어딘가에 대부분의 재산을 숨겨놓았다고 믿고 있었다.
200억 원도, 10억 원도 많은 재산이지만 둘의 차이는 결코 적지 않다. 이 인식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 적잖은 문제 소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령 A는 B에게 자식을 위해 월 500만 원짜리 과외를 한다고 속이고 C라는 40대 후반 여성에게 그동안 3억 원 정도를 몰래 가져다주었다. 한때 가톨릭 수녀였다는 C는, 남편 B와 달리, A의 고민을 성의 있게 들어주었다. 소통이 잘 됐다. C는 자신에게 기부를 많이 해야 A 아이들의 병이 낫는다고 했다. A는 100억 원을 받으면 그 돈으로 C와 함께 서로 마음을 위로하면서 살 예정이라고 했다.
한편 B는 이혼당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 외도를 한 것도 아니고,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고, 생활비를 안 준 적도 없는데 왜 이혼을 당해야 하느냐고 했다. 오히려 A에게 잘못이 더 많다고 지적했다. 이상한 여자(C)에게 낚여 돈을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분노조절장애가 있어 벽돌로 차 유리, 집 거실 유리를 다 깨뜨려놓았다고 했다. 심지어 자기 얼굴을 내리찍어 관자놀이부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면서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A는 B가 너무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함이 폭발해 순간적으로 실수했다고 말했다.
법적으로는 B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이혼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파탄주의’가 아니라 ‘유책주의’를 취한다. 간단히 말해서 파탄주의는 혼인관계가 파탄 나면 그 파탄에 책임이 있든 없든 이혼을 인정하는 것이고, 유책주의는 책임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드러난 증거만 놓고 따지자면 돈을 빼돌리고 벽돌로 기물을 파손하고 B에게 상해를 가한 A의 책임이 더 컸다. 물론 B에게도 ‘소통이 잘 안 된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판사가 말을 몇 마디 섞어보니 소통이 안 되더라 해서 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소통은 개념상 쌍방적인 것이라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게만 소통이 안 되는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통닭 함께 뜯는 장면 그려지지 않아
법적으로는 이혼청구가 기각돼야 할 사안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통닭을 함께 뜯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거듭 합의이혼을 권유했다. 이혼 재판을 하기 전에는 판사가 이혼을 하러 온 두 사람을 잘 화해시켜 잘 살도록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도합 두어 시간 당사자들을 만나서 수십 년간 쌓인 부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두 사람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자식들을 비롯해 불필요하게 추가로 상처받는 일이 최소화되도록 해주는 것만 해도 훌륭한 판사다. 나는 가정법원 판사가 불치병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의사가 아니라 고통을 덜 받고 사망하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끝내 A는 이혼하겠다, B는 이혼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결국 이혼청구를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소송 중 A가 “집구석에 통닭 한 번 사들고 온 적이 없어요”라고 말할 때 나는 A에게 그 통닭을 누구를 위해 사오기를 바랐느냐고 물어보았다. A는 순간 당황하면서 “아이들이요”라고 말을 흐렸지만 그 ‘아이들’에는 A의 마음속 아이도 포함된 것 같았다. A가 어릴 때 A의 아버지가 집에 통닭을 자주 사왔는지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아마 아버지가 통닭을 자주 사왔기에 그러지 않은 B가 비교가 됐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기에 B에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투사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추억을 되새기며, 아내가 남겨놓은 닭날개와 닭목을 싹 먹어치웠다. 혼자서 흥얼흥얼거리면서. 아무리 목을 먹어도 노래는 여전히 별로네.
* 이 글은 실제 사건을 일부 각색한 에세이입니다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
정재민 전 판사·작가
<이 기사는 신동아 3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