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내내 폴란드군은 좋게 말하면 전투의 결정적인 국면에, 다르게 말하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국면에 투입되곤 했다. 노르망디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을 거의 자루 속에 가두었고, 독일군은 마지막 남은 탈출구로 거세게 달려 나갔다. 압력과 저항이 대단한 자루의 끝을 묶는 임무에 투입된 부대가 폴란드군이었다. 그렇게 극렬하게 싸웠음에도 폴란드군은 이미 나라를 잃은 상태였기에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없었다. 이후 자신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지도 못했다. 생존한 폴란드군과 폴란드 국민은 종전 후에 더 큰 비극을 겪게 된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투입되었다. ‘옥쇄(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죽음을 말함)’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교리에 따라 미군에 생포된 포로는 극히 적었다. 타라와에서는 겨우 145명이었는데, 그중 12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때 투입된 조선인은 모두 1400명이었다.
일본 군인 중에도 조선인 병사들이 있었다. 미군은 조선의 사정을 알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해서 수용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청년 중에는 미군에 입대해서 일본과 싸우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미군은 제네바 협약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조선인 부대를 편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라를 잃으면 싸울 수도 없다.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싸워도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 3·1절의 계절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