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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나를 가둔 견고한 ‘망상의 성’

입력 | 2019-03-13 03:00:00

[홍은심 기자의 낯선 바람(風)]




《 정신병은 특별하지 않다. 낯선 곳에서 맞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다. 환자와 의료진의 실제 상담·진료 사례를 통해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우리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본다. 》

2018년 11월 15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일. 악몽은 이날부터 시작됐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오직 이날의 성공을 위해 썼다. 긴 인내의 과정이었고 쉽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D데이. 온몸을 감싸는 묘한 떨림이 숨죽은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웠다. 매 순간 조여 오는 긴장을 이겨내며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엉망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를 악물고 버텼던 3년의 시간이 물거품이 됐다.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말이 안 된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재수학원을 등록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학원 문을 빠져나오던 그날 밤.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쟤야?” “응, 공부도 지지리 못하면서 남자애들만 좋아한다는 애.”

낄낄대는 애들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집을 향해 뛰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 한번 나눈 적 없었다. 쉬지 않고 내달리는 통에 턱까지 차오른 숨을 정신없이 내뱉었다.

그 뒤로도 학원 아이들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따라다니고 대놓고 들으라는 듯 내 흉을 봤다. 편의점에 가도, 지하철을 타도 그들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가족과 집에서 나눴던 대화까지 숙덕거렸다.

급기야 한 남자애는 나를 쫓아 앞집으로 이사를 왔다.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를 훔쳐봤고 나의 표정을 살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집에 있어도, 방문을 걸어 잠가도, 그들은 나를 비웃었다.

다정한 아빠, 자상한 엄마.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다. 난 친구가 많지 않지만 학교생활을 성실히 했고 특별할 것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이런 일이 왜 내게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알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지긋지긋함을 참지 못해 가족에게 털어놨다. 아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적막한 고요를 깬 것 엄마였다. “그런 일은 없었어.” 엄마는 내가 겪는 일은 내 생각일 뿐이고 학업 스트레스로 잠시 헛소리를 들은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내 편이던 부모님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나야말로 믿을 수가 없다. 내 망상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럼 내가 미쳤다는 말인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엄마가 밉다.

엄마와 병원에 갔다. 의사는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니 힘들었겠다”고 했다. 수군거림으로 괴로웠던 시간들, 나를 믿지 않던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에 울컥 눈물이 났다. 나는 의사에게 “그 애들이 이제 내 이야기를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병원을 다닌 지 3개월여. 상담치료를 했고 약물을 처방받았다. 애들도 예전처럼 날 괴롭히는 일이 줄었다. 내가 겪은 일은 망상이 아니다. 그 애들은 분명 존재했고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와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어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이제 그들에게서 벗어나 날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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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은 전조증상이 길수록 예후가 좋지 않다. 간헐적으로 작은 사건과 소리가 반복되면 환자는 서서히 경험을 사실로 믿게 된다. 자신만의 견고한 망상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면 어떤 계기로 심한 충격을 받게 돼 갑자기 증상을 겪기 시작하면환자는 크게 당황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정신증 미치료 기간(DUP)’이 짧을수록 치료와 회복에 걸리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단축된다.
- 도움말 이명수 연세라이프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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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