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3년 갈릴레이가 바티칸 교황청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 브리지먼예술관 소장 작품. 작은 사진은 갈릴레오. 동아일보DB
○ 천동설과 갈릴레이의 도전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각각의 행성과 태양이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돈다는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이러한 가설을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가운데에 정지해 있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돈다는 이른바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에 관한 논문을 학계에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자신이 죽기 직전인 1453년에야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했습니다. 달을 관측하다가 달의 표면이 매끈한 구가 아니라 지구처럼 산이 솟아 있다는 사실, 태양에 흑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등을 발견했습니다. 또 계속된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성공합니다.
자신이 개량해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며 얼마나 놀라고 신기했을까요? 결국 갈릴레이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발견과 연구방법을 세상에 발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1610년 ‘별들의 소식’이란 책에서 “모든 행성이 태양 주위의 큰 궤도를 돌고 있듯이 어떤 행성이 다른 행성의 주위를 돌고 있기도 하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네 별이 목성 주위를 도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갈릴레이의 학설에 지지를 보냈지만, 교회와 성직자들은 1619년 종교재판을 통해 갈릴레이에게 감금형을 선고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
당시 70세였던 갈릴레이는 건강 상태가 대단히 나빴지만 로마로 소환됐습니다. 그는 종교재판에서 판사와 사제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 갈릴레이는 성무청으로부터 잘못된 견해, 즉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며 움직이지 않고,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인다는 견해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단 선고를 받은 이 학설을 발표했으며, 이 학설에 유리한 여러 근거를 제시하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실한 마음으로 나의 오류를 인정하며, 이단적 사상(지동설)을 다시는 말하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는 종교재판을 앞두고 얼마나 고민했을까요? 목숨을 내놓고 자신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 우주관을 지키거나, 자신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우주관을 철회했지만, 이는 진리라고 확신했으며, 성서와 자신의 천문학과는 전혀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판사들은 그에게 종신 감옥형을 선고했습니다. 1년 후 풀려나 피렌체 근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었고 항상 감시를 받으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 비약적인 과학의 발전
유럽의 과학혁명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전개됐습니다. 첫째, 과학이론의 발전과 기계의 발명이 서로 연결됐습니다. 망원경이 천문학의 발전에 공헌하고, 천문학의 발전이 망원경의 성능을 계속 향상시키도록 자극했습니다. 망원경의 배율을 점점 높이기 위해 렌즈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현미경도 더욱 발전했고, 뉴턴은 렌즈 대신에 오목 거울을 사용해 반사 망원경을 발명합니다.
둘째,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과학자를 적극 후원했습니다. 정부에서 연구소를 설립하고 과학자를 고용했습니다. 정부는 과학자들에게 봉급을 주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발표하도록 후원했습니다. 특히 영국 의회는 1624년 발명가에게 발명품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21년간 보장하는 특허제도를 신설했습니다. 발명가와 기술자는 점차 사회에서 우대를 받고 일부 사업가들은 그들을 고용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지요.
갈릴레이의 천문 연구와 종교재판에 대해 잘 이해하셨습니까? 여러분이라면 1633년 종교재판에서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서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