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별’로 불리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오른쪽).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제공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근 공연된 뮤지컬 ‘페치카’의 대사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건넨 사나이, 안 의사가 끝까지 지킨 그의 이름은 최재형(1858∼1920)이다. 이 작품은 연해주(프리모르스키) 독립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의 일대기를 다뤘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그를 페치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의 러시아 이름 표트르의 애칭이기도 했지만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의 페치카에 그의 따뜻한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을 취재하면서 최재형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뮤지컬이 공연됐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다음 달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 출범식 및 강연회’가 열린다. 이 행사는 한민족평화나눔재단,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8월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되는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도 예정돼 있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출간한 문영숙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2012년 연해주 여행 중 최재형의 흔적을 접하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선생에 대한 수식어는 열 손가락을 꼽아도 부족하다”며 “그는 기업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했다. 향후 구성될 추모위원회 홍보대사를 맡는 탁구감독 현정화 씨는 최근 ‘나의 독립영웅’이란 동영상을 통해 최재형을 소개했다. 그는 최재형을 ‘동토에 독립의 뜨거운 불꽃을 태운 페치카’라고 표현했다.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어린 시절 가족과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굶주림과 학대에 못 이겨 가출한 뒤 항구에서 실신한 상태로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됐다. 11세 때부터 6년 동안 선장의 배를 타고 견습선원으로 두 번의 세계일주를 하면서 글로벌 청년으로 환골탈태했다. 17세 때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무기로 군납 사업을 벌여 부호가 됐고, 이내 러시아 한인들의 대변자가 됐다. 그의 재산은 독립운동을 비롯해 30여 개의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교육 사업에 아낌없이 투자됐다. 그는 항일 의병조직 동의회, 한인 신문 대동공보, 한인 실업인 모임으로 위장한 항일단체 권업회를 이끌었다. 특히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함께 계획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최재형은 1920년 ‘4월 참변’ 때 일본군에게 체포돼 순국했다. 연해주 지역 일본인들이 러시아 적군(赤軍)에 의해 목숨을 잃자 일제가 이에 대한 분풀이로 무고한 조선인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지만 그가 주목받은 건 최근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삶이 독립운동뿐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에 위치한 스프링제조사인 ㈜서일의 채양묵 회장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이 롤모델”이라며 “목표가 있다면 최재형 선생의 흉상을 본떠 전경련 건물 로비에 놓고 싶은 소망이 있다.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다는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기업을 이끌기 바란다”고 말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북쪽 외곽 소비에트스카야 언덕은 최재형이 일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곳이다. 당시 잔혹했던 역사를 알려주는 기념비나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우수리스크 시내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는 최재형이 마지막까지 거주한 곳이다. 한때 러시아인 소유로 넘어갔지만 최근 재외동포재단 지원으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구입해 최재형 기념관으로 재단장하고 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