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 화면 캡처
존 볼턴(71)이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표악역이라면, 북한의 상대역은 단연 최선희(55·사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비 때마다 나서서 협상 판을 깰 수 있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최선희가 처음 주목 받은 것은 북-미 회담 전담 통역으로 외교무대에 나섰던 1990년대 말 부터입니다. 최영림 전 북한내각 총리의 수양딸로 유명하고 외무성에서 미국 담당 요직을 두루 거쳐 현재는 외무성 부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다시 열린 ‘험한 입’
15일 북한 평양에서 외신 기자, 외국 외교관을 대상으로 열린 회견에 참석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가운데). 평양=AP
언어의 톤은 좀 더 단호해 졌습니다. 15일 평양에서 가진 긴급회견에서 최선희는 “(김 위원장이) 미국의 기이한 협상태도에 곤혹스러워 했다”며 “미국의 강도 같은(gangster-like) 태도는 결국 상황을 위험에 빠트릴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분명한 것은 이번에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교착국면에서 최선희가 등장해 긴장을 고조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3주 정도 앞둔 시점에 그는 조선중앙통신을 통한 담화에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직접 겨냥해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횡설수설하며 주제넘게 놀아댔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강력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북-미 정상회담 취소라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각주: 추후 남북 판문점 정상회담에서의 중재노력 등으로 역사적인 첫 북-미 정상회담은 정상적으로 개최되었음)
이후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배석했지만 최선희는 ‘몸조심’ 행보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동 본색은 머지않아 다시 드러나는데요. 자의반 타의반 북핵 협상에서 손을 뗀 성 김 주 필리핀 대사 후임 격으로 새롭게 업무를 이어받은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를 근 6개월 간 만나주지 않는 등 특유의 악동 역할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 ‘볼턴은 내가 책임진다’
최선희가 다시 한번 전면에 등장한 것은 볼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트럼프의 백악관 신년연설을 본떠 국무위원장 집무실을 재단장하거나, 비건 특별대표의 직함을 의식한 듯 김혁철을 대미특별대표로 내세운 것이 비근한 예입니다.
언론 인터뷰를 앞두고 넥타이를 매만지고 있는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워싱턴=AP
하노이에서 돌아온 뒤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매체를 가리지 않고 대북 강경메시지를 분출하고 있는 볼턴의 대항마로 최선희가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트럼프의 배드캅이 볼턴이듯 김정은의 해결사는 최선희인 셈이죠. 유력 싱크탱크 관계자는 “지금은 볼턴과 최선희 타임”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은 현재의 협상이 교착국면이라는 뜻이고, 서로에게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탓입니다.
● 파국으로 가는 길?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양보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최선희 기자회견을 차분하게 뜯어보면 △미국과의 협상지속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 중단유지 여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내용이 더 핵심 메시지 아닌가 싶습니다. 협상을 깰 생각이면 즉각 미사일 발사하고, 핵실험 재개하면 될 일인데 굳이 기자회견을 통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좀 관심을 가져달라’는 애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두 번째)과 회의 중인 최선희 부상(오른쪽 두 번째). 사진 출처 노동신문
최선희가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높게 평가하고 “두 최고지도자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는 여전히 좋고 궁합(chemistry)은 신비할 정도로 훌륭하다”고 한 대목도 현재로서는 판을 깰 생각이 없다는 근거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최대 관심사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발표하겠다는 공식성명의 내용입니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행동계획을 밝히겠다는 건데 청와대와 외교안보라인이 분주해 질 것 같습니다. 서훈 국정원장의 방북 가능성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졌습니다. 물론 비밀방북의 형식이겠죠.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