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쓸 수 있을까/테오도르 칼리파티테스 지음·신견식 옮김 /196쪽·1만2000원·어크로스
1969년 첫 소설을 낸 이후로 그의 작품세계는 저절로 번성했다. 막힘없이 글이 나왔고, 모든 책은 그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40여 권의 책을 펴낸 노작가는 쓰지 못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형편없는 글을 써서 갈매기조차 키득거리면 어떡하나.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렵다.”
눈물겨운 노력에도 차도가 없자 그는 결국 마음을 바꿔 먹는다. “이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날 때가 됐다. 내 고국에서 이민을 떠나왔듯이 나 스스로에게서 이민을 떠날 때가 됐다.” 그렇게 절필을 선언한 그는 ‘쓰지 않는 삶’에 도전한다.
뿌리를 향한 여정은 그리스 고향집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집에서 그는 끝내 기억에 제대로 접속하지 못한 채 절망한다. “모르겠어. 뭔가 있긴 한데. … 생각이나 기억 같은 것. 근데 아무것도 없어.” “나하고 언어 사이를 가른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이 책은 작가가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쓴 첫 책이다. 오랫동안 제쳐뒀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듬으며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 과정을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글쓰기, 나이 듦, 자유와 관용 등의 주제를 따스하고 유쾌하게 넘나든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