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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서동일]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이집트 대통령

입력 | 2019-03-18 03:00:00


이집트 수도 카이로 시내 건물들은 대부분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쌓아올린 채 마감 작업을 끝낸다. 색깔을 칠해도 거센 모래바람에 색이 다 벗겨지기 때문이다.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 멀리서 보면 흙빛을 띤다. 카이로=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한 달 전부터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는 ‘페인트 회사’ 관련 주식을 사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카이로 중심가 건물에 통일된 색으로 페인트칠을 하라”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다. 시시 대통령은 칙칙한 모래빛깔 일색인 카이로 건물들이 ‘문명화되지 않았다(Uncivilized)’며 이렇게 지시했다. 카이로에 거주하는 무려 2200만 시민을 한순간에 비문명적인 건물에 사는 허름하고 초라한 이로 전락시킨 발언이었다.

카이로에는 ‘사막의 색’이란 표현이 어울릴 만큼 붉은 벽돌과 시멘트를 고스란히 드러낸 건물이 많다. 한국처럼 건물 외부 마감 작업을 예쁘고 깔끔하게 하지도 않지만 설사 알록달록한 색을 입혀 곱게 페인트를 칠한다고 해도 거센 모래바람에 금방 색이 바랜다. 한국 내부순환고속도로처럼 카이로 주변을 둥글게 감싸는 길이 109km짜리 도로인 링로드(The Ring Road)를 차로 달리면 모래바람과 먼지폭풍에 흙빛으로 변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정작 관광객들은 대통령의 우려와 달리 허름한 건물 외관보다 끔찍한 도로 사정과 카이로 시민들의 거친 운전 매너에 경악한다. 검은 매연을 내뿜는 낡은 승용차, 시속 100km를 넘는 차들이 달리는 도로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후진하는 차량, 무단횡단을 시도하는 사람…. 도로인지 로드무비 촬영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최근 테러범과 경찰이 링로드 위에서 총격전을 벌여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시시 대통령은 이런 사정을 잘 모를 것이다. 그가 움직일 때면 링로드 일부 구간이 아예 통제되니 도로 밖 풍경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링로드 위 지옥 같은 교통 상황과 주변을 조금만 걸어도 알 수 있는 천막과 판잣집과 시민들의 빈곤한 삶이 철권통치자의 눈에 보일 리 없다. 이집트 인구 중 40%가 불법 건물에 산다는 통계를 그는 알고 있을까.

시시 대통령은 카이로가 얼른 새 옷을 차려입고 화려한 외양만 뽐내기를 바라는 듯하다. 2011년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 이후 침체된 관광 산업을 되살리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집트는 내년 세계 최대 규모의 이집트 대박물관(the Grand Museum of Egypt) 개장을 앞두고 있다. 10억 달러(약 1조800억 원)를 투자한 박물관 개관식에 시시 대통령은 세계 각국 지도자를 초청해 호화로운 잔치를 벌일 계획이다.

이번 ‘페인트 발언’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집트 시민들의 삶을 감쪽같이 포장할 시시 대통령 나름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는 이집트의 ‘외관’에만 신경을 썼다. 건물만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집트 정부는 2016년 과체중 여성들이 TV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금지했다. 지난해에는 “국민 대다수가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어 보인다”며 뜬금없는 체중 관리까지 지시했다.

카이로 시민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 양팔을 앞으로 뻗어 수갑 차는 시늉부터 할 정도로 이집트 국민들은 시시 대통령을 두려워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는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올리면 “거짓 뉴스를 생산했다”며 체포돼 수감된다. 이러니 이집트 국민들은 ‘우리가 살이 찌는 원인은 대통령의 독재다. 우울하면 식욕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감추고 싶다면 차라리 담장을 높이 쌓아라. 일자리는 없고 대중교통 전기 등 물가만 오르는데 페인트칠 할 돈이 어디 있느냐’며 분노한다. 하지만 국가비상사태를 끊임없이 연장한 시시 대통령에게 이런 분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듯하다.

시시 대통령은 올해 말까지 도심의 모든 빈민가를 근절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어떤 곳이 빈민가인지 기준조차 없는 상태다. 페인트 발언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런 속 모르는 발언이 계속될수록 고물가와 실업, 주택난과 공공의료 체계 개선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뒤로 밀리고, 국민의 불만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웃 알제리에서는 이달 초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장기집권 중인 대통령의 5선 도전을 막았다. 시시 대통령의 철권통치라고 유효 기간이 없을까.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