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 북한 외무상(오른쪽에 앉은 사람)과 최선희 부상이 1일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에 대한 북한 측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노이=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든 핵무기와 미사일,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 전체를 포기하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협상의 판을 깼다, 우리 위원장님은 피해자다’라는 식의 세계 여론 선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15일 평양에서 북한 주재 외교관과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 긴급 기자회견을 연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입니다. 러시아 타스통신의 1보로 알려지기 시작한 기자회견은 AP통신 등 순전히 평양에 지국을 두고 있는 외신들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북한의 대내용인 노동신문은 관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번 기자회견 역시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국제용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은 지난 30여 년의 핵·미사일 개발 과정에 자신들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마다 세계 언론과 외교가를 상대로 선전전을 벌여 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등 우호국을 설득하고 상대국의 유력 인사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나팔수 역할을 맡기는 ‘초청외교’를 반복해 왔습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비핵화 흥정을 하다 한 방 맞고 온 옛 사회주의 동생국가 북한을 싸고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국에게 버림받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동정의 전문을 보낸 것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15일 북한 노동신문). 하지만 북한의 노력이 진정 세계 여론을 변화시켜 미국의 대북정책을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진영과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현 사회주의 국가 진영이 편을 가를 때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던 서유럽의 여론은 여전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해 싸늘한 반응입니다. 영국과 프랑스,독일 등의 언론과 외교가에서는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에 대한 동정심은 ‘1도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대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신만 여전한데, 북미 회담 전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대충 합의하는 ‘나쁜 거래(Bad Deal)’ 가능성을 우려했고 회담이 깨지자 저러다 또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할까봐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는 세계 여론이라는 것을 실체가 없는 신기루 정도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론은 자신의 생각을 전세계의 것으로 포장하고 싶은 개별 국가들의 헛된 망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각국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의 국가이익 관점에서 저마다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태두로 추앙받는 고 한스 J 모겐소 전 시카고대 교수는 그의 대표작인 ‘국가간의 정치’에서 세계 여론의 허망함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 당국자들의 필사적인 세계 여론 선전전은 그 자체의 효과를 믿기 때문으로 보기 힘들어 집니다. 오히려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로 빈손으로 돌아온 뒤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독재의 하수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선희 부상은 김 위원장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유예(모라토리엄) 재개와 관련해 조만간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재재를 풀기 위한 협상이 또 다른 제재를 부르는 우를 범하길 바라지 않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그 길을 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빈센트 부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이 말한 ‘김정은 체면 살리기(face saving)’가 가뜩이나 북한 편이 아닌 세계 여론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 말입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