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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공연 도중 “대한독립만세”… 관객 수백명도 목숨 걸고 “만세”

입력 | 2019-03-20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5화>충남 홍성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1일 일제의 무력 진압에 항거하는 홍성 민초들의 모습을 재현한 행사가 홍성읍내에서 열렸다. 홍성은 유림과 농민이 적극 주도하고 참여해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홍성군청 제공

14일 충남 홍성군 장곡면 3·1공원으로 가는 길 곳곳엔 태극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 공원은 장곡기미3·1운동 유족회가 해마다 3·1운동 기념식을 치르는 곳이다. 단정하게 조성된 3·1운동 기념비에는 ‘창의기(倡義記)’라는 제목으로 건립 취지를 담은 글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이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거센 의병 활동을 기리기 위해 홍주읍에는 의병기념탑이 세워졌다. 기념탑의 의병인물상 모습. 홍성=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홍성군 장곡면은 1919년 전국에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 가운데에서도 열기가 뜨거웠던 대표적인 지역이다. 이를 증명하듯 홍성군 곳곳에서는 ‘홍주 천년’이라는 홍보 글귀를 만날 수 있었다. ‘홍주(洪州)’는 홍성(洪城)의 옛 이름이다. 1018년 고려시대부터 ‘홍주’라는 지명이 쓰였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 표면적으로는 군·면 통합령에 따랐다지만 의병 활동이 활발했던 이 지역의 항일 분위기를 누르기 위한 개명(改名)이었다는 분석이 정설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이 지역의 일제에 대한 저항은 거세고 매서웠다.

○ 연극 무대에서 부르짖은 “조선 독립 만세!”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홍성 지역에선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랐다. 3월 7일 홍성읍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는 시야 김종진(1901∼1931)이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육촌 동생이다. 열여덟 살 나이에 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김종진은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석방됐지만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3월 8일 광천면 광천시장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이 나붙으면서 일경들을 긴장시킨 것은 광천면 출신 박세화였다. 그는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이웃 주민들에게 보여주고 만세시위를 기획했다.

3·1운동 직후 홍성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투철한 항일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림과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던 지역 특색 때문에 홍성은 전통의식이 강했다. 역사적인 경험도 있다. 이곳에선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유생들의 주도로 격렬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후대에 ‘홍주의병항쟁’으로 불리는 이 항쟁은 홍성 지역 만세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4월 1일 홍성군 금마면 가산리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우선 시간과 장소가 남달랐다. 당시 대부분의 만세 시위는 대낮에 장터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이곳에선 오후 8시에 임시로 만들어진 연극 공연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 소개된 금마면 시위 기록은 다음과 같다. ‘민영갑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음에 호응하여 이재만과 공모하여 4월 1일 금마면 가산리 이원교 집에서 한국 연극의 흥행이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르고자 김재홍, 최중삼, 조재학과 조한원의 찬동을 받고 민영갑, 이재만, 김재홍, 최중삼, 조재학, 조학원은 이날 밤 8시경 동 연극 흥행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수창하여….’

관련 판결문에 따르면 이날 관객은 수백 명이나 됐다. 공연이 진행되던 중에 민영갑 등 시위 주도자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관객들은 이에 호응해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전국적으로 신파극이 유행했고 지방 곳곳에서 가설 공연장이 세워진 때였다. 주로 마당이 넓은 집에 연극 무대가 만들어졌다. 4월 1일 금마면 이원교의 집에 차려진 임시 공연장도 그중 하나였다.

이날 어떤 연극이 공연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만세운동의 현장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지난달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주최로 열린 학술포럼에서 김진호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 논문 ‘홍성지방 3·1만세운동의 전개와 성격’에 따르면 금마면 시위에 참여한 이재만은 약장수로 위장해 서울을 왕래하면서 서울 소식을 홍성 지역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 홍성 출신 만해 한용운(1879∼1944)이다. 3·1운동의 준비 단계부터 운동이 펼쳐지는 과정에 대한 소상한 정보가 이재만 등을 통해 만해의 고향 홍성군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또 금마면 공연장 시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치열했던 장곡면 시위 또한 홍성 지역에서 일어난 주요한 만세운동으로 꼽힌다. 이 시위 역시 밤에 일어났다. 4월 7일 장곡면 화계리 주민 오경춘이 종을 쳐서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이웃 광성리와 신풍리 주민들이 합세해 300여 명이 화계리 앞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은 도산리로 이동했고 면사무소 뒤편 응봉산으로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오후 8시, 면사무소 앞에 모여 선 군중들은 돌과 막대기 등으로 유리창 17장을 깨고 굴뚝과 문기둥을 부쉈다.(김진호, ‘홍성 지역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3집, 2004년)

‘독립운동사’에 실린 이날 시위에 관한 재판기록에서는 ‘김동하는(…) 군중과 함께 장곡면 사무소에 쇄도하였을 때 군중에게 면사무소를 부수라고 외치며 솔선하여 나무와 돌로 유리창과 온돌 굴뚝과 문기둥을 부수어 군중에게 힘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시위의 격렬함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 날 오후 11시에는 학생과 주민 60여 명이 같은 장소에 다시 모여 만세를 부르면서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경찰과 보병이 출동해 총기를 발포하면서 2명이 부상하고 11명이 체포됐다.

○ 무력 탄압에 맞선 평화적 횃불시위

홍성군 장곡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장곡3·1 운동기념비. 홍성=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횃불독립만세운동은 3·1운동이 지방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돋아난 시위의 한 형태다. 그해 3월에 평남 용강군, 함북 길주군, 충북 청주군 주민들이 야간에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하순부터는 충남으로 번졌다. 홍성의 대표적인 만세운동 형태이기도 했다.

4월 초 홍성군에서 횃불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한 곳이 아니라 군내 여러 지역에서였다. 장곡면에선 4월 7일의 공격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사흘 전에 횃불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윤형중 윤익중 윤낙중 삼 형제의 주도로 전개된 운동이었다. 경신학교 2학년이었던 윤낙중이 2월 말 중앙고보 4학년인 형 윤익중으로부터 만해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하는 3·1운동 소식을 듣고서였다. 윤익중과 윤낙중 형제는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품고 3월 20일 낙향한다. 고향에 있던 큰형 윤형중 및 이웃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4월 4일 매봉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4월 5일 밤 홍동면 신기리 주민 100여 명이 마을 뒷산에 모여 불을 피우면서 만세를 불렀다. 4월 7일 구항면에서도 마을 주민들이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구항면의 횃불만세운동은 의병장 이설의 제자였던 이길성이 주도한 것이다. 그는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결심하고 집에서 ‘大韓國獨立萬歲(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쓴 큰 종이깃발을 만들었다. 이길성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월산 남쪽 기슭에 올라 이 깃발을 세우고 횃불을 올리면서 독립 만세를 부른다.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일단 하산하지만, 이길성 등 5명의 시위 주도자들은 장소를 이동해 산 정상에서 홍성 시가를 바라보면서 다시 만세를 불렀다. 횃불만세운동은 평화적인 형식의 시위였지만 일제의 대처는 폭압적이었다. 무차별 사격으로 2명이 죽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체포 구금된 13명이 태형을 당했다.

김진호 연구원은 “횃불독립만세운동은 충남 지방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서 만세시위가 일반화되면서 농민들의 적극적인 주도와 참여로 전개됐다. 홍성 곳곳에서 횃불만세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은 농민의 참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 “어찌 서명의 선후를 다투겠나… 가장 말석이라도 달게 여길것” ▼

호서 유림으로 파리장서운동을 이끈 지산 김복한 선생. 홍성군청 제공

“국내의 여러 사람을 얻어 연명하여 파리에 글을 보내어 內敵(내적)과 外寇(외구)의 情跡(정적)을 밝혀 舊臣(구신)과 遺民(유민)의 원통함과 분함을 표명하고자 하니 그대 뜻은 어떠한가?”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거주하던 지산 김복한(1860∼1924)은 인근에 살고 있던 임한주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은 유학자였다. 김복한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朝鮮復國原書(조선복국원서)’를 작성하기 전의 일이었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당시 유림을 대표하는 137명의 인사가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일을 가리킨다.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가 합동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개시하자 유림들이 호응해 벌인 운동이었다. 의병 운동을 주도했던 호서 지방의 유림들인 김덕진, 안병찬, 김봉제, 임한주 등이 중심이 됐고, 김복한이 서한 집필을 맡았다. 현재 서한의 원본은 사라지고 없지만, 알려진 요지는 다음과 같다.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기신배약(棄信背約)을 듣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시해에 온 국민이 품는 분울한 정을 말하고, 끝으로 우리의 국토를 찾고 이씨 왕조를 일으킬 뜻을 기술하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호서 유림들이 이렇게 작성한 서한을 파리로 보내기 직전 김창숙, 곽종석 등이 속한 영남 유림들도 같은 계획을 세운 뒤 장서를 작성했음을 전해 듣는다. 독립에 대한 유생들의 열망이 같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에 호서 유림과 영남 유림의 양측 대표가 만나 논의한 끝에 영남본이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영남본 장서를 보내기로 한다. 서명 순서도 첫째는 영남의 곽종석, 둘째가 호서의 김복한이었다. 당시 호서 유림 사이에선 서명 순서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김복한은 “오직 모든 것은 우리의 성의에 있는 것이지 어찌 서명의 선후를 다투겠는가? 비록 가장 말석에 참여한다 해도 달게 여기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서 지역 인사로 장서에 서명한 유림은 모두 17명이었다.

영남 유림 김창숙은 이 장서를 짚신으로 엮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져갔고, 임시정부는 이를 영문으로 번역한 뒤 한문 원본과 같이 인쇄해서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했다. 이 장서가 중국과 국내 곳곳에도 배포되면서 수많은 유림이 체포되고 투옥됐다. 김복한도 100여 일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호서본 장서가 채택되지 않았고, 원본이 남아 있지도 않지만 파리장서운동은 홍성이 꼽는 중요한 독립운동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기념해 홍성군은 2006년 홍성읍 대교리 대교공원에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를 세웠다.

홍성=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