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신 사회부 기자
임산부석 앞에서 불룩한 배를 잡고 힘겹게 서 있는데도 양보를 받지 못했다거나 임신부 배지를 보여주며 양보를 요구했지만 “진짜 임신부 맞느냐”는 말을 들으며 배를 찔렸다는 경험담처럼 공분을 자아내는 사례도 적잖다. 그러다 보니 임산부석은 비워둬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태가 나지 않는 임신 초기 여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임산부석만 비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 지하철의 임산부석은 2013년 11월 생겼다.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대통령이 ‘수요자 맞춤형 출산 여건 대책 마련’을 지시한 게 시초였다. 서울시는 임산부 지정석 설치를 제안했고 보건복지부는 임산부를 배려하는 대중교통 문화 정착에 협조해줄 것을 관련 기관에 요청했다. 2015년 이후 지금의 핑크색으로 디자인이 바뀌었다.
결국 약자를 배려하는 각종 시설은 ‘사회적 배려’로 운영되는 셈이다. 배려는 구성원 간 신뢰에 기반을 둔다. 임산부석에 앉아 있다가 비켜줘도 된다고 애기하는 쪽에서는 ‘무조건 임산부석을 비워두라는 건 서로 신뢰를 못 한다는 뜻’이라고 비판한다. 임산부석이 오히려 사회적 불신을 키울 바에는 임산부 전용석을 만들고 임산부 아닌 사람은 이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게 낫다는 얘기도 한다. 임산부석을 상시 비워두라는 것은 임산부는 임산부석에만 앉으라는 말이고, 그 자리에 임산부가 앉아 있을 때 다른 임산부는 서 있어야 하느냐는 반문도 들린다.
사실 임산부석이 아니어도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는 게 배려다. 물론 그 정도로 배려나 신뢰 수준이 높지 않으니 임산부석을 만들었을 게다. 그렇다면 만든 이상 비워두는 게 배려라는 논리도 가능하다. 답이 없는 순환논리에 빠진 듯하다.
며칠 전 임산부석에 가방을 놓고 서서 가는 중년 여성을 봤다. 임산부석에 앉았을 때 쏟아질 시선에 눈치가 보이지만 빈 좌석을 놔둘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절충으로 보인다. 이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서로 믿으며 배려하는 사회를 위한 대화는 작은 부분부터 활발히 이뤄질 필요가 있다.
한우신 사회부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