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의 전쟁사에도 배수로로 잠입해 전투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배수로를 막아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대부터 축성기사들은 배수로의 참극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배수로는 직선이 아니고 꺾여 있다. 사람이 기어 들어와도 창이나 장비를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파르테논 신전이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를 방어하는 산성 요새이기도 하다. 그 성벽에 있는 배수로도 삼년산성처럼 휘어져 있다. 그 외에도 성마다 고안한 여러 가지 설계가 있다. 수로 중간에 철책을 설치하거나 수로 중간에 깊은 수조를 만들어 침투자가 익사하도록 한다. 성벽 밑으로 깊은 지하수로를 파고, 강 밑으로 연결시켜 배수구 자체를 감추는 방법도 있었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고, 힘든 공사를 해도 사람이 만들 수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사의 슬프고도 위대한 진실이다. 평화로운 시기라고 해도 전쟁은 계속된다. 새 아이디어와 기술을 고안하고, 부수고 수정하고 새로 만든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낭비고 심지어는 비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은 개인이 참아낼 수만 있다면 평생 같은 것만 먹고 입으면서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을 위한 준비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패배와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