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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관심종자 김용옥, 學人 최장집

입력 | 2019-03-27 03:00:00

김용옥, 질풍노도의 나이 지났지만 화려한 학력에 비해 업적 초라하고
여전히 관심받지 못하면 못 배겨… 최장집, 재기발랄한 학자는 아니지만
정확한 문제의식에 배우는 자세로 진영을 초월한 예리한 비판정신 보여




송평인 논설위원

최근 KBS 방송에 출연해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하는 김용옥 씨를 보면서 일본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를 떠올린 것은 마루야마가 1940년대에 쓴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한글번역판(1995년)에 장문의 서문을 쓴 사람이 마침 김 씨이기 때문이다. 서문은 한편으로는 마루야마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한편으로는 허황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마루야마는 도쿄대 법대를 나와 20대 후반의 나이에 김 씨 자신이 중국 학자 펑유란의 ‘중국철학사’와 더불어 동아시아인이 쓴 20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은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를 썼다. 김 씨는 고려대를 나와 대만대 도쿄대 하버드대에서 두루 공부하고 나이 70세가 넘도록 동양 사상을 연구했지만 지금까지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무슨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받은 화려한 교육에 비하면 이룬 학문적 업적은 초라하다.

19세기 이후 학문을 하는 사람은 근대(modern)라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를 이해해야 탈근대(post-modern) 이해도 가능하다. 마루야마는 에도 시대 유학자 오규 소라이가 성리학적 관점에서 탈피해 정치를 도덕에서 구별해냄으로써 일본의 근대를 사상적으로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맞건 틀리건 그는 학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김 씨도 마루야마 같은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최한기의 기학, 최제우의 동학 등을 통해 조선 성리학 세계에서 근대로의 출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은 근대의 사상적 준비에 왜 실패했는지 해명하지도 못했고 그럼에도 오늘날 이만큼 큰 성취를 이룬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보여주지도 못했다.

김 씨는 TV에 나와 논어 금강경 요한복음 등 이미 신성(神聖)의 지위는 고사하고 우상의 지위마저 상실한 경전들에 대해 우상파괴적 비판을 가하며 불필요한 가학(加虐)에 빠져들었다. 젊어서 도발은 패기이지만 나이 70세가 넘도록 도발만 하고 있는 것은 한계다. 도발을 넘어 포지티브(positive)한 정립에 이를 수 없는 무능력과 스스로 부풀린 자아상(自我像) 사이의 간격이 그를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로 관심종자(關心種子·관심을 받지 못하면 못 배기는 유형)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학자가 소피스트처럼 궤변으로 대중을 놀라게 하는 데 재미를 붙여선 안 된다. 한국 현대사를 언급하는 학자라면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 즉 왜 이승만의 한국은 성공 국가가 되고 김일성의 북한은 실패 국가가 됐는지 우선 해명해야 한다. 물론 더 나은 나라로 가기 위해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고, 사실 북한과 달리 그런 반성이 작동하는 시스템이 한국을 성공 국가로 만들었다. 다만 반성이 궤변이 돼 반성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무덤에서 파내자는 식의 망발을 해선 안 된다.

최장집 씨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정치학을 전공했지만 패거리 의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진보 학자들과는 달리 진영을 초월하는 비판정신을 보여주는 학자다. 그는 15년 전 노무현 정권을 향해 ‘과거사 진상규명’ 같은 이념 문제를 앞세워 현실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도외시한다고 질타했고, 최근에는 보수 학자들도 잠자코 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의 ‘친일 청산’ 발언은 관제(官制) 민족주의라고 과감히 비판했다.

최 씨는 김 씨처럼 재기발랄한 학자는 아니지만 또 김 씨처럼 재기만 발랄한 학자도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정치학자로서 그의 문제의식의 정확함을 보여준다. 그를 우리 시대 정치의 발견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는 선악의 이분법적 투쟁보다는 정치가 필요한데 정치를 투쟁으로 되돌리는 것은 정치적 타협에 의한 시급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연기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 씨가 정년퇴임 후 그 연륜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치학의 기초 고전, 즉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고전을 제자들과 함께 읽고 제자들이 새로 번역한 책에 직접 해설을 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노교수가 초심의 대학원생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관심종자와 학인(學人), 70대 지식인의 어느 두 초상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