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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의 재발견]〈95〉햅쌀을 해쌀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

입력 | 2019-03-27 03:00:00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햅쌀이라는 단어의 표기는 좀 어색하다. 뒤에 놓인 ‘쌀’은 우리가 잘 아는 그 ‘쌀’이다. 그러면 ‘햅-’은 뭘까. 일상의 단어들은 ‘햅-’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 햇과일, 햇고구마, 햇감자

‘당해에 생산된 것’이라는 의미를 덧붙이려면 ‘햇-’을 붙이면 된다. 햅쌀 역시 ‘당해 수확한 쌀’이다. 당연히 의문이 생긴다. 왜 받침이 ‘ㅅ’이 아닌 ‘ㅂ’인가? ‘ㅅ’이 아닌 이유부터 보자.

● 해쑥, 해콩, 해팥

당해 새로 수확한 ‘쑥, 콩, 팥’을 가리키는 말인데도 ‘ㅅ’ 받침이 없다. 여기에는 사이시옷 표기 원칙 하나가 관여한다. 뒷말이 ‘된소리’나 ‘거센소리’로 시작할 때는 사이시옷을 넣지 않는다. ‘머리+속’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머리+속’의 발음은 [머9쏙/머리쏙]이다. ‘∼의 ∼’ 구성에서 앞말의 받침이 [ㅂ, ㄷ, ㄱ]이면 뒷말의 첫소리는 자동으로 된소리가 된다. 중요한 현상이다. 뒷말의 ‘머리+속’에서 ‘속[쏙]’의 된소리로 앞말의 받침에 [ㅂ, ㄷ, ㄱ]으로 소리가 날 ‘ㅅ’을 밝혀 적는 것이다.

그런데 ‘쑥’은 이미 된소리이다. ‘콩, 팥’의 첫소리 ‘거센소리’에도 된소리의 속성이 들었다. ‘ㅅ’을 적을 필요가 없는 위치라는 말이다. ‘햅쌀’의 뒷말 ‘쌀’은 된소리로 시작한다. ‘ㅅ’을 적을 위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해쌀(×)’로는 적지 않을까? 현재 우리말에는 과거의 질서가 든 경우가 많다 했다. ‘ㅂ’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예들을 더 살펴보자. 아래 예들에는 모두 ‘ㅂ’이 들었다.

● 찹쌀, 좁쌀, 멥쌀

현재 우리말은 단어 첫머리에 자음이 두 개 이상 오지 못한다. 단어 초에 ‘세 개’의 자음이 온 ‘spring(봄)’을 우리말답게 소리 내려면 ‘스프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종대왕이 살아계시던 15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어의 첫머리에 두 개 이상의 자음이 왔음을 문증하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쌀’은 15세기에 ‘(米)’로 단어 첫머리에 ‘ㅂ, ㅅ’을 갖던 단어였다. 이 단어들의 첫소리가 거의 모두 된소리로 변하고 단어 첫머리에 관련된 규칙이 변하는 과정에서 이 예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과 결합해 쓰이던 ‘햅쌀, 찹쌀, 좁쌀, 멥쌀’에는 옛날 ‘쌀’이 가졌던 첫소리 ‘ㅂ’을 오늘까지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리쌀’이 ‘보립쌀(×)’로 소리 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옛 문헌은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세종대왕이 살았던 15세기 문헌에는 ‘보리쌀’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보리’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그만큼 연원이 짧은 단어라는 의미다. 게다가 이 17세기는 ‘’이라는 단어가 ‘ㅆ·ㄹ’로의 변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두 가지 사정이 현재 ‘보립쌀(×)’이라는 발음이 남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