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 햇과일, 햇고구마, 햇감자
● 해쑥, 해콩, 해팥
그런데 ‘쑥’은 이미 된소리이다. ‘콩, 팥’의 첫소리 ‘거센소리’에도 된소리의 속성이 들었다. ‘ㅅ’을 적을 필요가 없는 위치라는 말이다. ‘햅쌀’의 뒷말 ‘쌀’은 된소리로 시작한다. ‘ㅅ’을 적을 위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해쌀(×)’로는 적지 않을까? 현재 우리말에는 과거의 질서가 든 경우가 많다 했다. ‘ㅂ’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예들을 더 살펴보자. 아래 예들에는 모두 ‘ㅂ’이 들었다.
● 찹쌀, 좁쌀, 멥쌀
현재 우리말은 단어 첫머리에 자음이 두 개 이상 오지 못한다. 단어 초에 ‘세 개’의 자음이 온 ‘spring(봄)’을 우리말답게 소리 내려면 ‘스프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종대왕이 살아계시던 15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어의 첫머리에 두 개 이상의 자음이 왔음을 문증하는 예가 많이 나타난다.
‘쌀’은 15세기에 ‘(米)’로 단어 첫머리에 ‘ㅂ, ㅅ’을 갖던 단어였다. 이 단어들의 첫소리가 거의 모두 된소리로 변하고 단어 첫머리에 관련된 규칙이 변하는 과정에서 이 예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그 흔적조차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과 결합해 쓰이던 ‘햅쌀, 찹쌀, 좁쌀, 멥쌀’에는 옛날 ‘쌀’이 가졌던 첫소리 ‘ㅂ’을 오늘까지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리쌀’이 ‘보립쌀(×)’로 소리 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옛 문헌은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세종대왕이 살았던 15세기 문헌에는 ‘보리쌀’이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다. ‘보리’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그만큼 연원이 짧은 단어라는 의미다. 게다가 이 17세기는 ‘’이라는 단어가 ‘ㅆ·ㄹ’로의 변화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두 가지 사정이 현재 ‘보립쌀(×)’이라는 발음이 남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미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