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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경찰이 피해여성 앞에서 몰카영상 확인… “말 못할 수치심”

입력 | 2019-03-27 03:00:00

불법촬영물 조사과정 2차피해




2017년 말 여고생 A 씨는 자신의 알몸이 찍힌 동영상이 음란 사이트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친구한테서 들었다. 동영상을 찾아본 A 씨는 영상 속 장소를 한눈에 알아봤다. 남자 친구 집이었다. 영상 조회수는 100만 회가 넘었다. ‘100만’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A 씨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길을 걸을 때마다 ‘옆을 지나는 남자가 내 나체를 본 100만 명 중 한 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6개월간 우울증 약을 복용한 A 씨는 학교 친구들이 자신이 나오는 ‘몰래카메라(몰카)’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국 자퇴했다.

A 씨는 동영상을 확인한 지 약 1년 만인 지난해 10월 경찰서를 찾아 남자 친구를 고소했다. 불법 촬영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리는 등 사회적으로 몰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용기를 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과정에서 A 씨는 또 한 번 상처를 받았다. A 씨가 고소장을 내던 날 2명의 남자 경찰이 A 씨를 앞에 두고 이어폰을 낀 채 A 씨가 등장하는 영상을 10여 분간 본 것이다. 영상 속 등장인물이 A 씨가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A 씨는 “경찰이기 전에 이들도 남자인데 영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싶었다”고 털어놨다.

디지털 성범죄가 늘면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수사기관의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현장의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모텔에 몰카를 설치해 성관계 장면을 촬영한 전 남자 친구를 지난해 고소한 B 씨는 “남자 경찰이 성관계 영상을 내 앞에서 보고 있는데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고 했다. 수사기관은 불법 촬영물의 촬영자나 영상에 등장하는 피해자를 특정해야 하기 때문에 영상 확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영상 확인은 여경이 직접 하거나 남자 경찰이 하더라도 피해자가 없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 경찰청 훈령의 ‘성폭력 범죄의 수사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규칙’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성폭력 피해 여성은 여성 전담 조사관이 조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여성 경찰의 조사는 권장 사항이다. 의무는 아니다. 인력 상황 등에 따라 여성 전담 조사관을 붙이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불법 촬영물로 인정되려면 해당 촬영물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됐다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조사하는데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C 씨는 3년간 교제하던 남자 친구를 지난해 8월 불법 촬영 및 유포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C 씨는 46장의 사진이 사실상 ‘불법 촬영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사진들이 C 씨의 동의 아래 촬영된 것으로 판단했다. C 씨의 변호사는 “경찰은 C 씨가 ‘찍지 말라’는 의사를 밝혔거나, 몰카 촬영 사실을 알고 난 뒤 지우라고 요구한 사진도 C 씨가 동의한 촬영물로 봤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촬영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불법 촬영물로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몰카 피해의 심각성을 안일하게 보는 언행도 문제로 지적된다. 교제하던 남성이 자신과의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한 사실을 알게 된 D 씨는 지난해 3월 파출소를 찾아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초범이라 (형량이) 얼마 안 나올 거다. 영상 수가 얼마 안 되면 좋게 끝내라”는 황당한 말을 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부대표는 “‘왜 처신을 제대로 못 했느냐’는 식의 직접적인 2차 가해 발언은 물론이고, ‘유포 영상은 확인이 어렵다. 가해자 특정이 안 되니 고소 못 한다’는 식의 무신경한 태도도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언행”이라고 지적했다.

김재희 jetti@donga.com·신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