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현장/창간 99주년] 장날에 학생-시민 만세운동… 3296명 체포, 219명 숨져 ‘만세운동길’ 골목투어 진행
대구 중구 도심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 만세운동 재현 행사에서 류규하 중구청장 등 참가자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대구 중구 제공
대구 중구 동산동 제일교회 담벼락 아래로는 90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3·1만세운동길이 있다. 대구 만세운동 당시 주축이 됐던 계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신명여학교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집결 장소인 서문시장으로 몰래 갈 때 사용한 그 길이다.
대구에서는 서울보다 일주일 늦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열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저지하러 온 일본군대가 주둔하는 등 대구에는 강점기 초기부터 일제의 여러 기관이 들어서 만세운동을 벌이기에는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10대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1919년 3월 8일부터 그해 4월 28일까지 약 두 달간 이어진 대구 만세운동 과정에서 219명이 숨지고 916명이 다쳤으며 3296명이 체포됐다. 실형이 선고된 95명 중 학생이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대구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3월 8일은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와 남산정교회(현 남산교회), 계성학교 등의 목사, 전도사, 교사, 학생들은 장날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이면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좋고 상인과 시민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장날을 택했다. 서문시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약 1000명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서문로를 따라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까지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행진했다. 종로를 지나 약전골목과 남장대 터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까지 나아갔다.
이들의 평화로운 행진과 만세시위는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대구시민은 굴하지 않고 같은 달 10일과 30일 남문밖시장(현 염매시장)에서 2, 3차 만세운동을 벌였다.
당시 만세운동의 주 무대가 지금의 대구 중구다. 중구 곳곳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만세운동이 시작된 서문시장은 현재 위치가 아닌 중구 동산동 오토바이골목에서 서성로 사이에 있었다. 일제는 1920년 지금의 자리로 서문시장을 강제로 옮겼다고 한다. 만세운동을 부른 서문시장 터가 못내 눈엣가시처럼 생각돼서는 아니었을까. 오토바이골목 입구에는 대구 만세운동 발원지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중구 대신동 계성중학교 아담스관은 1908년 대구 최초의 선교사인 제임스 애덤스가 지은 영남 최초의 양옥 학교 건물이다. 현재 계성중 교무실로 사용되는 아담스관 지하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만세운동을 앞두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남성정 교회 지하에서도 만세운동 참여자들이 숨을 죽이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3·1만세운동길 주변에는 1900년대 초 대구 시내와 만세운동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시해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중구는 매년 3·1절 이곳과 도심에서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라며 “100년 전 독립과 세계평화를 향한 선열들의 외침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박광일 기자 light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