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현장/창간 99주년]서울의 3·1운동 이전부터 계획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실행… 6차례 시위에 1500여 명 참가
100년 전 전남 장성에서 가장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펼쳤던 북이면 모현리에 건립된 삼일사. 류상설 고용석 정병모 등 주민 1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성군 제공
전남 장성은 예로부터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군민 모두가 힘을 합쳐 구국활동을 펴온 의향(義鄕)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항의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2001년 발간된 장성군사(長城郡史)에 따르면 장성에서는 서울의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있었다. 장성에서의 만세 시위는 삼서면 소룡리, 장성읍, 모현리 등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가장 먼저 일어난 삼서면 소룡리의 만세운동은 송주일이 주도했다. 그는 1919년 3월 8일 광주시 양림동에 사는 송흥진으로부터 장성에서의 만세시위를 촉구하는 서신을 받았다. 송주일은 3월 10일 광주 만세운동에 맞춰 마을의 예수교 예배당에서 교인 70여 명에게 서신을 읽어줬다. 편지의 내용은 ‘조선은 이제 독립하게 됐으니 면사무소와 동내 이장은 물론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독립만세를 외칩시다’였다. 교인들은 이날과 3월 17일 두 차례 독립만세를 외쳤고 결국 송주일은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같은 시기 장성읍에서도 기독교인들에 의해 만세시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이들은 3월 15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일본 헌병대의 삼엄한 경계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때 장성지역 유지였던 정선유가 나섰다. 그는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와 평양의 숭실학교를 마친 후 1918년 10월 장성읍에 예배당과 사립 숭실학교를 세워 교인과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장성읍의 만세운동이 지지부진하자 정선유는 교인과 학생, 청년들과 함께 3월 21일에 장성읍내를 휩쓸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헌병대가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이들은 장성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이어갔다.
주동자가 체포되는 등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장성의 만세운동은 계속됐다. 4일 밤부터 삼서면, 진원면, 남면, 동화면에서는 산마루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다른 면에서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장성에서는 6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참가 인원은 15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의 진압에 의해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15명, 검거자는 15명이었다.
일본 헌병 사령부가 전남의 만세운동 상황을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폭도들은 의기가 드높아 경찰관이 체포하려고 오른손을 잡으면 왼손으로 만세를 부를 정도로 열광적이고, 도망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장성의 만세운동은 당당하고 격렬했으며 그 후로도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는 도화선이 됐다.
장성에는 두 곳에 항일 유적지가 있다. 장성공원에 있는 ‘3·1운동 열사 장성 의적비’는 애국지사 13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 건립됐다. 북이면 모현리에는 기미년 만세운동을 후세에 알리고 지사들을 배향하는 ‘삼일사’가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