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대통령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 권력이 5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안다. 겉으로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일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시간이 지나면 다 흐지부지된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30년 동안 중앙부처 요직을 두루 거친 전직 고위공무원의 솔직한 참회록이다. 민주화 이후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역대 대통령마다 ‘규제 전봇대’나 ‘손톱 밑 가시’ ‘붉은 깃발’을 없애겠다며 규제 혁신을 외쳐왔다. 하지만 그 성적표는 공허했다는 게 냉정한 평가다.
세계는 이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의 공무원 조직은 변하지 않고 있다. 과거의 행동 패턴과 기득권을 버리지 않은 채 낡은 생각으로 만든 규제를 휘둘러 미래를 향한 진전을 막고 있다. 대통령은 혁신을 외치지만 일선 공무원들은 굴뚝 산업을 규제하던 낡은 방식을 버릴 생각이 없다. 시늉만 낼 뿐이다. 때문에 분초 단위로 바뀌는 기술을 따라잡지 못한다. 글로벌 경쟁 시대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기업과 민간의 노력은 발목을 잡히기 일쑤다.
규제 혁신을 하려면 규제를 만들고 집행하는 공무원부터 변해야 한다. 공무원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만 규제 완화의 첫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다. 공무원 수가 늘어날수록 규제 또한 증가한다는 역설의 법칙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규제 개혁을 외쳐왔지만 20년간 등록규제 건수는 2배 이상 늘었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집계한 등록규제 수는 2000년 6912건에서 2009년 1만2905건, 2015년에는 1만4608건에 달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철밥통’ 공직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프로젝트별 계약직 공무원 채용, 공무원 감축, 공무원의 민간기업 임시 파견 등 인사혁신을 추진하는 것도 이 같은 판단 때문이다. 일자리 창출을 공무원 수 확대에서 찾는 문재인 정부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낸 불굴의 역사다. 지난해엔 인구 5000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고지에 올라선 ‘30-50 클럽’에 가입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을 포함한 7개국뿐이다. 이 같은 대한민국 성공사는 공무원들의 헌신적 노력과 기업들의 ‘기업가 정신’,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력이 어우러진 결과다.
그런데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공무원 조직이 갈수록 대한민국의 도약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무원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근본부터 바뀌어야 한다.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각오로 공직사회의 체질 개선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과 실천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