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과 동아일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결실로 창간된 동아일보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중 있게 다루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고 민족정신 함양과 문화창달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지지
동아일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독립 민주정신을 계승하여 창간됐다. 1920년 4월 1일은 민족대표 33인과 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한 인물을 포함한 48인이 민족운동 사상 가장 엄중한 재판을 앞둔 시기였다. 앞서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1919년 4월 11일에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선포문’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간명하게 규정하였다. 9월 11일에 선포한 ‘임시헌법’ 제1조도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으로 명문화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在)함’(제1장 2조)이라 하여 국권 상실 이전의 전제 군주제를 폐지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제를 선언했다.
창간사에 담긴 3대 주지는 첫째,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自任)하며 둘째,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셋째, 문화주의를 제창했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항목은 상하이 임시정부 헌법을 그대로 반영했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민족의 대변지를 자처하여 창간 첫 호부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구속, 재판 기사를 파격적인 비중으로 다뤘다. 민족대표 48인을 포함해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은 옥중에서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지만, 3·1운동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3·1운동을 주도해 재판을 받은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을 담은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3면. ‘금일이대공판’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실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을 활자로 재현하기 위해 3·1운동 지도자 48인에 대한 재판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DB
공판은 1920년 7월 12일부터 정동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열렸다. ‘금일이 대공판(大公判)/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당국의 처치는 어떻할지’라는 제목으로 민족대표의 사진을 거의 한 페이지를 할애해 게재했다. 3·1운동 주역들을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한 역사적인 편집이었다. 체포된 민족대표가 48인에서 47인으로 한 사람이 줄었던 이유는 양한묵(천도교)이 재판을 받기 전 1919년 5월 16일에 옥사했기 때문이다.
평양의 만세소요로 첫 압수
공판이 7월, 8월, 9월까지 진행됐는데 사회면 대부분을 공판기사로 채웠다. “독립의 의지, 운동의 동기는 뼈에 사무친 압박의 채찍과 망국의 원한, 4천년 역사가 있는 조국을 일본에 빼앗김은 참 원통”(1920년 9월 24일), ‘초목에 맺친 이슬까지도 망국의 눈물인가’(9월 25일)와 같은 감상적인 부제를 달았다. 전 국민의 이목을 끌고 관심이 집중되도록 편집한 지면이었다.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비참한 정황도 신문에 실렸다. 동아일보 창간 전인 1919년 9월 2일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를 타던 때에 수류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의 장남 강중건이 전하는 옥바라지의 어려움도 널리 알렸다. ‘아 캄캄한 죽음의 손! 아 참혹한 굶주림의 귀신! 강우규의 말로(末路), 찌는 여름 철창 아래에 사형 우에 주림까지도’(1920년 8월 11일)라는 기사는 사형 집행의 날을 기다리는 강우규와 그를 옥바라지하는 가족의 비참한 정황을 묘사했다. 강우규는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대동단(大同團) 사건에 연루됐던 강매를 비롯한 4명은 면소(免訴)되어 1920년 6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출옥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30일자에 ‘대동단사건 관계자, 강매 씨 외 4인 출옥’ 소식과 함께 같은 지면에 ‘서대문감옥 후산(後山)에서 야반에 만세성’ 제목으로 “수십명 군중이 모여 크게 만세를 부르짖어”라고 보도했다.
‘황실의 존엄 모독’ 이유로 제1차 정간
총독부는 마침내 동아일보에 정간을 명령했다. 직접적인 이유로 지적한 글은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였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 구슬, 칼 등 이른바 3종의 신기를 가지고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8월 30일부터 연재 중인 ‘대영(大英)과 인도’(9월 25일까지 14회 연재)도 문제였다.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창간 후 여러 차례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으며 그때마다 거듭 주의를 환기했고, 8월에도 발행인을 소환해 최후의 경고를 한 바 있었는데도 로마의 흥망을 논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말하며 이집트와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으로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정치를 부정하야 일반의 오해를 심절(深切)케 함에 노력했다”고 정간 처분의 이유를 밝혔다.
총독을 정면 비판하고 사임 촉구
“동아일보로서는 3·1운동으로서 일제의 극악한 무단통치를 물리치면서 특히 언론·출판 등에 있어서 최소의 자유나마 한민족이 쟁취하였다는 점을 항상 명심하고 있다. 3·1운동의 여파로 그 만세의 기운이 충만해 있던 시점에서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며 동아일보는 창간됐기 때문이다. 3·1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의의를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전국의 3·1운동 유적지를 찾아 12곳에 기념비를 세웠고, 이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