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9화> 제주
3월 21일 ‘해녀 항일운동’(1932년)을 상징하는 제주 해녀들(위 사진)이 제주도 북쪽 조천리 앞바다에서 전달받은 ‘독립의 횃불’을 뭍으로 이동시킨 뒤 제주의 관문임을 상징하는 곳이자 당시 일본 순사 주재소로 사용됐던 연북정(아래 사진)에서 점화 행사를 치렀다. 제주항일기념관 제공
지난달 21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이례적인 행사가 진행됐다. ‘제주 3대 항일운동(법정사 항일운동·조천 만세운동·해녀 항일운동)’ 유족과 관련 단체들이 총집결한 것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진행 중인 ‘독립의 횃불’ 릴레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조천리 앞바다에서 ‘해녀 항일운동’(1932년)을 상징하는 제주 해녀들이 뭍으로 전달한 횃불은 제주의 관문으로 통하는 연북정에서 점화행사를 가진 뒤 독립운동 유가족 및 단체들에 의해 최종 목적지인 미밋동산에 전달됐다.
조천리 일주도로 인근에 위치한 미밋동산은 1919년 3월 21일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진 곳이다. 제주 올레길 18코스의 종점이자 19코스의 시작점인 미밋동산에 ‘만세동산’이란 별칭이 붙여진 이유다. 이곳 정상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탑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묘사한 조각상도 새겨져 있다. 또 제주도 160인의 순국선열 위패를 모신 창렬사와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항일기념관 등도 자리 잡고 있다.
제주도 항일운동의 성지(聖地)인 이곳에서 제주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에 치러진 횃불 릴레이 행사는 성대히 끝났다. 횃불은 다시 육지(전남 목포)로 되돌아갔고 전북 익산, 충남 천안 등을 거쳐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 11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 ‘독립의 횃불’은 조천3·1만세운동의 발상지이자 제주도 3대 항일운동의 성지인 미밋동산으로 옮겨진 가운데, 제주 3대 항일운동 유족 및 단체들이 모여 성대한 기념식을 치렀다. 제주항일기념관 제공
천혜의 포구를 갖춘 조천리는 조선 후기 때부터 애월 화북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뱃길로 목포와 연결되는 해상 교통 요지였다. 3·1운동 당시 경성(서울)에서 제작한 독립선언서도 이 루트를 통해 제주도에 전달됐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16세 나이로 만세운동에 뛰어든 휘문고보생 김장환이었다. 조천리 출신인 김장환은 3·1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일본 경찰의 시위자 색출 작업이 강화되자 3월 16일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으로 귀향한다. 김장환은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이다. 김시학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송진우(3·1운동 당시 중앙학교장·동아일보 사장 역임), 신익희(일본 조선유학생학우회 회장 역임) 등과 교분을 나누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한국독립운동사’).
이들의 척사(斥邪) 의식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時)’자 돌림 중 맏형격인 김시우는 척사론을 펼친 면암 최익현의 문인인 김희정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아 척사론을 신봉했고, 그의 영향으로 김씨 집안 대부분이 척사론을 따랐다. 이들은 한일강제병탄 이후 일제를 척사의 대상으로 삼고, 항일 활동에 적극 나섰다. 제주 토박이인 제주학연구센터 박찬식 센터장은 “김씨 일가는 일제가 조선의 황국화 정책 일환으로 펼친 신정(新正·양력 1월 1일)을 거부하고 음력 설을 고집한 것으로 지역 사회에서 유명했다”고 전했다.
3월 17일 김장환 등 3인은 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한 뒤 동지 규합에 나섰고, 이틀 뒤인 19일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 김경희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김연배 백응선 등 11명을 끌어 모아 ‘14인의 동지’를 만들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거사일은 3월 21일로 정했다. 이날은 제주 유림계에서 명망이 높던 김시우의 기일(忌日)이었다. 유림 세력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명분이 있어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선택된 날이었다. 거사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됐다. 김형배가 대형 태극기 4본의 제작을 담당했고, 김시범 백응선 등은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의 제작을 맡았다. 또 신촌 함덕 등 인근 주민들과 서당 생도들도 거사에 합류하도록 설득했다.
제주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주역인 김장환 선생의 생가 터. 조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14인의 동지’ 중 한 사람인 그는 현재까지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그가 살았던 집터는 쓰레기장으로 방치돼 있다. 제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마침내 거사일이 밝자 150여 명이 비장한 심정으로 미밋동산에 모였다. 14인의 동지 중 한 사람인 김필원은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쓴 ‘대한독립만세’를 들고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현재 연북정 자리) 서쪽에서 동쪽에 위치한 미밋동산까지 행진했다. 혈서와 독립만세 함성에 고무된 사람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그가 미밋동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군중이 5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튿날인 22일 조천장터에서 2차 시위가 진행됐다. 김필원 백응선 박두규 등의 주도로 200여 명이 모여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펼쳤다. 이날 시위로 박두규와 김필원이 체포됐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됐다.
사흘째인 23일 다시 시위(3차)가 전개됐다. 백응선 이문천 김연배 등이 조천장터에서 1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행진을 시작했다. 시위대가 장터 인근에 위치한 함덕리에 도착했을 때 지역 청년들과 주민들이 합세했고, 시위대 규모는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시위에서는 백응선 등 8명이 체포됐다. 이 가운데에는 “대한독립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라는 구호를 열창하던 여성도 포함돼 있었다.
잇따른 일경의 탄압에도 만세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고 이어졌다. 나흘째인 24일은 마침 조천지역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14인의 동지 가운데 일경의 손을 피했던 김연배가 중심이 돼 무려 15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4차)를 펼쳤다. 이날 시위에는 장을 보러 나왔던 부녀자들이 상당수 합세했다.
이날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면서 조천 만세운동은 일단락된다. 14인의 동지 전원이 검거돼 동력을 잃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경무국과 조선군사령관이 작성한 ‘3·1운동 1차 보고’).
○ 선상 등불 시위로 확대
조천리에서 지펴진 만세운동의 열기는 제주 남쪽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서귀포에서는 4월 1일 오후 8시경 어선 수십 척이 등불과 태극기를 선두(船頭) 돛대에 높이 달고 북을 울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서귀포 삼매봉에서는 불을 피워 만세를 부르다 주모자 10여 명이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이병헌, ‘3·1운동비사’).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서귀포 선상 시위는 조천만세운동이 지역적으로 확산된 결과로 보이며, 이 시위가 훗날의 제주 해녀 항일운동으로 계승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옥고를 치른 14인의 동지는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1921년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했다. 동미회 조직원들은 감옥에서 새끼를 꼬아 번 돈을 모아 공동 관리하면서 제주에서 펼쳐진 항일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20년 3월 일경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한 백응선의 묘소에 기념비를 몰래 세우는 등 끈끈한 동지애도 발휘했다. 이들의 항일운동 이후 제주에서는 민족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돼 1920, 30년대 제주 항일운동을 이끌어갔다.
제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