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선언서 제주해녀운동까지 한국 독립운동사와 한 호흡 “아직도 인정 못받은 어른 남아있어”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현 논설위원)를 지낸 김명식 선생이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맞춰 발표한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
항일독립운동 가문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공자 수가 많은 조천 김해김씨 후손인 김용욱 씨(73)는 “조천 김씨들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역할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2018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김시범(1890∼1948) 선생의 손자다.
실제로 이들의 항일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와 맥을 같이한다. 먼저 김명식(1890∼1943)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유학 중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간사부장으로 활동했고,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김시은(1887∼1957)과 김시범은 조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씨 가문 중에는 당시 항일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언론사였던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은 이들도 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論說班) 기자(현 논설위원)로 맹활약했다. 그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축시 ‘비는 노래’와 ‘새 봄’ 2편을 발표했고, 1940년 4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제1차 대전 후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7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의 조카뻘이자 조천 만세운동을 제안했던 김장환(1902∼?)은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1923년 3월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했다.
제주=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