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00년 맞이 기획 / 환경이 미래다] <2> LG전자 ‘물과학연구소’
2016년 7월 한 정수기 업체의 얼음정수기에서 중금속인 니켈이 검출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국내 정수기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깨끗한 물을 마시려고 산 정수기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소비자들의 반품 요구가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업체의 정수기에서마저 유해물질이 나왔다는 제보가 나오면서 정수기에 대한 소비자 불신은 극에 달했다.
당시 이 파동은 LG전자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환경 이슈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잘나가던 기업도 하루아침에 소비자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었다. 이병기 LG전자 물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LG전자처럼 다양한 가전제품을 파는 기업은 한 제품에서 신뢰의 문제가 생기면 기업 브랜드 자체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내부 공감대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게 계기가 됐다. LG전자는 2012년부터 부속 실험실로 운영해오던 수질분석실을 지난해 2월 물과학연구소로 독립시켰다. 연구 인력도 기존 대비 4, 5배로 대폭 늘렸다. 이 선임연구원은 “연구개발(R&D)의 결과는 하루아침에 나오는 게 아니기에 꾸준히 미리 준비한 기업만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며 물과학연구소의 설립 의도를 설명했다.
지난달 28일 찾은 경남 창원시 물과학연구소는 LG전자 R&D센터 내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연구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곳엔 국내 최고의 물박사들이 모여 있었다. ‘워터필터연구실’과 ‘수질분석연구실’로 구성된 이곳에는 물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필터 성능 테스트 기기와 무기물, 미생물을 연구하는 고가의 실험 장비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물과학연구소는 국제 기준에 따라 연구소를 평가하는 한국인정기구(KOLAS)로부터 수질 관련 14개 항목을 인정받은 국가공인 수질검사기관이다. 지난해 영국 환경식품농림부가 주관하고 전 세계 3000여 기관이 평가받는 식품분석숙련도평가(FAPAS)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오차범위가 0에 가까울수록 분석능력이 높은데 연구소가 분석한 오차범위는 0.0이었다.
이런 정밀한 기술 덕분에 물과학연구소는 정수기 관련 연구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물을 받아 수질을 분석하고 솔루션을 제공하는 ‘수질 지킴이’ 역할도 한다.
2017년 물과학연구소(당시 수질분석실)는 방글라데시의 식수 성분 분석을 의뢰받고 사회공헌 활동에 나섰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최소 200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 저소득층이 식수 오염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추산하는 등 방글라데시의 물 오염이 심각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실제 독극물의 일종인 비소 성분이 많아 국민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다. LG전자는 이 결과를 토대로 국제구호개발 비영리단체 굿네이버스와 협력해 방글라데시의 취약계층이 많이 사는 시라지간지 지역에 상수 공급시설을 만들었다. 지하 100m 깊이에 있는 깨끗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저수탱크에 저장한 후 상수관을 통해 각 가정에 공급하는 시설이다. 인근 마을 주민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공동 식수시설도 만들었다. 현재 총 2500가구, 1만2500명의 주민이 혜택을 보고 있다.
물과학연구소는 식수원 부족에 허덕이는 인도에도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인도는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로 인해 식수가 탁하고 미생물 함량이 높아 수질이 나쁜 편이다. LG전자는 2011년 국내 기업 중 최초로 인도 정수기시장에 진출했다. 현지 수질을 고려해 큰 이물질을 먼저 걸러내는 전(前) 필터를 탑재한 정수기를 공급하고 있다. 올해 초 갠지스강에서 열린 인류 최대 종교 축제 ‘쿰브 멜라’에 정수기 45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물과학연구소는 나이지리아 등 열악한 식수 환경에 놓인 국가의 LG전자 현지 법인 의뢰를 받아 수질 분석을 해주고 있다. 국내에서도 소비자들이 요청하면 수질 분석을 해주고 있다.
▼ 물 이어 공기-식품까지 철저 검증후 가전 적용 ▼
친환경 연구소 잇달아 설립… 제품 기증 사회공헌도 이어져
“환경과 소비자 건강을 위해 가전제품은 연구 단계부터 철저히 검증한다.”
LG전자는 이 같은 모토를 앞세워 지난해 초 ‘물과학연구소’를 개소한 이후 ‘공기과학연구소’와 ‘식품과학연구소’를 잇달아 신설했다. 물·공기·식품연구소를 모두 갖춘 유일한 전자 회사인 셈이다. 일상이 돼 버린 미세먼지 불안처럼 생활 속 공포로 등장한 환경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세 연구소는 전문 연구 인력을 보유한 것은 물론이고 관련 교수진들로 구성된 외부 기술자문단이 꾸려져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금천구 LG전자 가산연구개발(R&D)캠퍼스에 문을 연 공기과학연구소는 집진, 탈취, 제균 등 공기청정 관련 핵심 기술의 연구개발을 전담한다. 올해 초 청와대에서 열린 ‘2019 기업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문재인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들이 경내 산책을 하던 중 이 연구소가 언급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기과학연구소는 집 안의 다양한 공간에서 공기질의 변화를 측정하고 효과적인 청정 방법을 연구해 공기청정기와 에어컨 등 제품 전반에 적용한다. 실제 생활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먼지와 유해가스, 미생물 등을 측정하고 제거하는 실험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경남 창원시 R&D센터에 있는 식품과학연구소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설립됐다. 식품을 가장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는 보관기술을 비롯해 발효기술, 조리기술 등을 연구한다. 냉장고와 오븐, 전기레인지 등 다양한 주방가전에 기술들이 적용된다. 교수진 외에도 농촌진흥청 세계김치연구소 한국식품연구원 등 정부기관과 연구소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술자문단과 공동으로 기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세 연구소의 연구가 고스란히 반영된 제품들은 LG전자의 사회 공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LG전자는 올해 1월 262개 전국 모든 아동복지생활시설에 공기청정기 3100여 대를 무상 지원하기로 했다. 초중고교에도 공기청정기 1만 대를 무상 지원할 예정이다. 3월에는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 정수기 200대를 기증했다.
창원=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