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앨리 스미스 지음·김재성 옮김/336쪽·1만4000원·민음사
한 번으로 끝내려 한 만남은 일생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한창때 당대 예술인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었던 글럭은 엘리자베스의 성 ‘디맨드’가 프랑스 어원을 따라 ‘세상의’라는 뜻을 지녔으며, 예기치 않게 여왕이 될 운명이라고 알려준다. “평생의 친구. 우리는 때로 평생을 기다려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된단다.”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조숙한 소녀와 진지한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년) 시리즈 못잖은 재미를 준다. “호텔에 가 놓고 돌볼 책임이 있는 아이에게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던 척해 본 경험 있으세요?” “질문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돼 있는지 알아야겠는데?” 거대담론부터 시시껄렁한 소재까지 죽이 척척 맞는다.
“민주주의가 마치 누군가가 깨부숴 무기로 쓰겠다고 위협할 수 있는 유리병쯤 되는 것 같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넘쳤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씨가 말랐다.” 매혹적인 우정 사이로 시대의 아이러니를 무겁지 않게 짚어낸다. “내가 사랑에 빠진 건 사람이 아니었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처럼 아껴 읽고 싶은 잠언들도 빼곡하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