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불 재난사태 선포]화마 할퀴고 간 속초-강릉-고성-인제
폭탄 맞은 듯 5일 오전 강원 속초시 영랑동 한 폐차장의 폭탄을 맞은 듯한 모습. 전날 밤 강원 고성군에서 시작돼 강풍을 타고 번진 불이 폐기 예정 차량 100여 대를 새까맣게 태웠다. 차량은 대부분 철골 형체만 남았다. 속초=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장천마을에서 나고 자란 엄기성 씨(47)는 터만 남은 집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엄 씨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부터 50년 넘게 살면서 두 형제를 키워주신 곳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농사지으며 이 집에서 우리를 키우셨다”고 했다.
바람이 향하는 방향에서 비껴 있어 불길을 피한 주민들은 피해를 입은 주민의 손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이들은 “힘내라는 말도 안 나와, 어떡해” “뭘 좀 먹어야지, 살았으면 되는 거야”라는 말을 건네며 위로했다. 새카맣게 타버린 집 앞에는 이웃들이 가져다 놓은 빵과 물, 과자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불에 탄 마을 곳곳에는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마을 너머로는 파란 바다가 넘실거렸다. 하지만 화마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흑백사진처럼 회색빛으로 바래 있었다.
속초시와 고성군 일대 관광 명소도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한화리조트 안에 있는 6만3720m²(약 2만 평) 규모의 영화세트장은 거대한 잔해로 변했다. 드라마 ‘대조영’ 등 사극 촬영지로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바다를 마주한 풍차 모양 건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한 대형 커피전문점은 육각형 철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다. 영랑호 리조트 인근 펜션과 창고 일부도 불에 탔다.
속초시의 한 물류창고는 불길에 휩싸이면서 지붕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창고에 있던 맥주병 1만여 개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엉겨 붙어 있었다. 속초터미널의 물류창고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다. 속초 전역 택배 물량의 절반 이상이 여기서 처리돼 택배 발송에 당분간 차질이 빚어질 것으로 보인다. 5일 터미널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도착한 택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불이 옮겨 붙으면 대형 화재로 이어질 수 있는 주유소 주변에는 밤새 소방관들이 사투를 벌인 흔적이 남아있었다. 속초시 노학동의 한 주유소와 폐차장 주변에는 밤새도록 뿌린 물들이 재와 뒤섞여 얼룩져 있었다. 또 연료통을 떼지 않은 폐차들이 급히 옮겨진 듯 도로변에 제멋대로 주차돼 있었다. 고성군에 있는 경동대 기숙사에도 불이 옮겨 붙을 뻔했다. 학교 뒷산을 집어삼킨 불이 건물로 번지기 직전에 진화된 듯 불에 탄 검은 땅과 타지 않은 땅의 경계가 뚜렷했다.
고성=김자현 zion37@donga.com·박상준 / 강릉=신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