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0화> 경남 함안
지난달 20일 열린 군북 만세시위 기념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경남 함안군 군북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시위대 선두에 섰던 조용규 대역이 총을 맞고 쓰러진 모습. 함안=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함안군 제공
경남 함안군 칠북면엔 이런 내용을 담은 비가 서 있다. 현재 칠북초등학교 이령분교 자리인 연개장터에서 1919년 3월 9일 경남 최초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경남의 한가운데쯤에 위치한 함안은 예부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였다. 특히 낙동강을 통해 경남 내륙지방의 농산물과 부산, 마산 등의 해산물이 교역됐던 연개장터는 손쉽게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면 소재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비밀 유지에도 유리했다. 연개장터 만세시위가 다 끝난 뒤에야 일제 경찰이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뒤늦게 조사에 나섰을 정도였다.
○ 일제 경찰서장과 친일 군수를 혼내주다
‘함안군지’와 ‘경남지역 3·1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함안 장날인 3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날 만세시위에 앞서 비봉산에서 오후 1시경 고천제가 열렸다. 이후 시위 주동자인 이희석이 산에서 내려와 태평루에 집결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대형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알기 쉽게 한 장으로 정리한 독립선언 전단과 태극기가 배포됐다.
3000여 명이 오후 2시경부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경찰 주재소. 때마침 함안의 수상한 움직임을 보고받고 직접 시찰 나온 기타무라 마산경찰서장이 주재소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사이 군청을 비롯해 등기소, 우체국, 보통학교 등이 습격을 당했다. 민인호 군수는 군청으로 몰려드는 군중에게 “해산하라”고 외치다 달아났다. 시위대는 순사부장의 집 목욕탕에 숨어 있던 민 군수를 붙잡아 선두에 세우고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했다. 그가 “제복과 제모를 착용하고 있어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거부하자 시위대는 “너는 대한의 백성이 아니냐”며 모자와 칼을 빼앗아 제복을 갈기갈기 찢었다. 민 군수는 청년들에게 얻어맞은 뒤에야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서장과 군수가 얻어맞은 이날 시위에 대해 일제는 “본도에 있어서의 악성 소요로서, 그 정도 또한 전반을 통하여 가장 심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오후 5시 40분경 뒤늦게 출동한 진해 경중포병대대 병력과 마산경찰서 경찰은 시위 가담자 80여 명을 체포했다.
2일 둘러본 옛 함안면 주재소 자리는 듬성듬성 나무가 심어져 있고 풀들이 무성한 빈터로 남아있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이조 북촌리 이장은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일제강점기 주재소와 군청이 모두 불탔다”며 “옛 군청 자리에는 함성중학교가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 군북장터로 번진 독립 열기
사실 함안 시위에는 군북면 출신이 다수 참가했다. 조상규 조용규 이재형 조정래 조성규 조경식 조형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백이산 서산서당과 여향산 원효암에서 군북장터 시위를 준비해왔다. 서산서당 팀은 알기 쉽게 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등사하는 작업을 했다. 원효암 팀은 태극기에 붉은 물감을 칠하고 대나무를 잘라 깃대를 만들어 붙였다. 일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서당에는 한문 공부를 하러 간다고 둘러댔고, 깊은 산속에 있는 원효암에는 나무꾼임을 가장했다. 또 군북면 서기였던 이재형이 경찰과 밀정의 동태를 정탐해 시위 지도부에 매일 보고했다.
군북 시위 주도자들은 한문 공부를 하는 척하며 서산서당에 모여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몰래 만들었다. 함안=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거사일인 20일 날이 밝았다. 서장과 군수가 크게 망신당한 3·19 함안 시위로 일제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일부 계획이 변경됐다. 당초 낮 12시 군북장터에 집결할 예정이었으나 시위 참가자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다. 장터에서 가까우면서도 공간이 넓은 군북 냇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기로 했다. 오후 1시경 냇가에 모인 수가 3000명을 넘어섰다. 1시 정각에 조상규가 둑 위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수천 명의 만세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여러 마을을 거치면서 규모가 점점 커졌다. 보리밭을 매던 농부들과 냇가에서 빨래하던 부녀자들까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 단일 시위로 삼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
우체국과 면사무소를 공격한 군북 시위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불렀다. 전날 함안 시위 때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도 요구했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계 중인 군경과 시위대 사이에 몸싸움도 벌어졌다.(‘군북 3·1 독립운동사’)
일제 군경이 검은 물감을 탄 물을 소방차를 이용해 뿌리는 것을 시작으로 해산에 나섰다.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저항하자 공포탄 20여 발이 발사됐다. 일부 참가자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때 대형 태극기를 흔들던 조용규가 나섰다. “헛총이다. 물러서지 말라”는 고함에 다시 투석전이 불붙었다. 일제 군경은 주재소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조준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집단 발포에 주재소 주변은 피바다로 변했다. 시위를 독려했던 조용규가 대형 태극기를 손에 붙든 채 총에 맞아 숨졌다.
이날 일제 군경이 60여 발을 발포해 시위대 21명이 숨졌다. 일제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벌어진 1919년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군북 시위에서 발생했다. 일제 군경 12명도 돌과 몽둥이에 맞아 부상했다. 일본 민간인 1명은 현장에서 숨졌다. 2일 기자에게 군북 시위 현장을 안내한 박기학 군북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숨진 일본인은 군북 시가지에서 잡화상을 하면서 경찰의 밀정 노릇을 하던 사람”이라며 “발포에 분노한 군중에게 몰매를 맞아 숨졌다”고 설명했다.
조선군 1군사령관이 본국의 육군대신에게 제출한 보고서는 당시 충돌이 격렬했음을 잘 보여준다.
“군중의 태도가 점점 난폭해져 공포를 발사했고…폭위(暴威)가 심해져 재차 공포를 발사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더욱 폭행의 도를 높여 폭민의 투석으로 부상하는 병졸이 생기므로 부득이 실탄 사격을 개시하고 근접하여 폭행하는 자는 총검을 휘둘러 찔렀다.”
함안 시위에서 발휘된 강한 결집력은 지역 특성과 관련이 있다. 1919년 당시 함안군에 17개 서원과 향교가 있었을 정도로 유교적 전통이 강했다. 실제로 일제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3월 19일 함안 시위와 3월 20일 군북 시위는 모두 유림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함안은 또한 경남에서 종족마을이 가장 발달된 곳이었다. 일본인 거주자도 적어 일제 치하에서도 전통적인 향촌 공동체적 유대가 온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감이 강한 조직력과 결속력으로 발휘됐다.(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 노구 이끌고 3·19 시위 선도… 유치장서도 “이 도적놈들아” 당당 ▼
‘함안의 저항’ 이끈 우봉 안지호
조선총독에 두차례 독립청원서… 3·1운동전부터 일제 요시찰 대상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마산형무소는 함안 사람들의 재실(齋室)’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재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문중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함안 사람들이 마산형무소에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다.
함안의 저항을 이끈 지도자는 우봉 안지호(1857∼1921)였다. 서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안지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1917년에는 일본이 도적의 마음으로 백성을 포악하게 다스린다고 규탄하는 글을 함안 주재소 창유리를 깨고 그 안에 넣어 잠시 구속됐다. 파리평화회의가 열린 1919년에는 조선도 독립이 돼야 한다는 독립청원서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에게 두 차례나 보내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경남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에 있는 안지호 의사 유허비(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 안 의사가 1921년 옥사한 뒤 마산형무소에서 장지까지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 주민들은 길에 나와 곡을 하며 추모했다고 한다.
시위대는 몽둥이와 도끼로 주재소 흙담장, 출입문, 판자벽 등을 부수며 그를 구출해냈다. 풀려난 안지호는 큰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했다. 일제 지원 병력이 도착했을 때 주변에서 피신을 권했지만 “도망하는 것은 의사(義士)의 도(道)가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안지호는 재판정에서도, 감옥에서도 당당했다. ‘함안항일독립운동사’ 등에 따르면 1심에서 그는 징역 3년이 선고되자 “함안군의 모든 의거는 내가 한 것이니 나 혼자만 처단하라”고 외쳤다.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됐을 땐 “왜 종신형을 주지 않느냐. 3년보다는 7년이 나으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산감옥에서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 간수가 보석을 조건으로 자백서를 쓸 것을 요구하자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자백서를 쓰라고 하느냐”며 꾸짖고는 종이를 찢어버렸다. 결국 그는 1921년 12월 옥중에서 숨졌다. 정부는 1964년 그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지만 그의 얼굴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증손자인 안희주 씨는 “혹시 사진을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연락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함안=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