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00년맞이 기획 가짜뉴스와의 전쟁] <中> 언론의 가짜뉴스 대응도 진화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언론사들은 가짜뉴스에 대응하기 위해 사내 보도는 물론이고 정치인 등 외부 인사의 발언 등에 대한 팩트체킹을 강화하고 있다. 사진은 뉴욕 맨해튼 8번가에 위치한 NYT 본사 건물 전경.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 “30년 전에도 가짜뉴스가 있었다”
미 정부의 조사 결과 당시 소련 정보당국이 ‘오퍼레이션 인펙션(Operation InfeKtion)’이란 암호명의 가짜뉴스 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련은 이 ‘AIDS 음모론’을 무려 6년간 세계 80여 개국에 전파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가짜뉴스 공작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 영상을 제작한 애덤 엘릭 NYT 오피니언 동영상 책임프로듀서는 기자와 만나 “소련의 허위정보 작전에 대응했던 30여 년 전 국무부 문서를 읽으면서 마치 현재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그는 “가짜뉴스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알려주기 위해 이 동영상을 기획했다”고 덧붙였다.
NYT 측은 AIDS 음모론 등 과거와 현재 논란이 된 수십 개의 가짜뉴스 사례를 분석하고 7가지 공통된 패턴을 찾아냈다. 이를 통해 가짜뉴스가 일종의 잘 짜인 ‘대본(playbook)’처럼 유사한 패턴을 반복하면서 확산된다는 점도 알아냈다. 냉전 시대와의 차이는 대량 유포에 걸리는 시간뿐이다. 당시엔 가짜뉴스가 널리 퍼지는 데 일정 기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가짜뉴스를 퍼뜨릴 수 있다.
미 언론은 자사 보도의 정확성을 높이고 허위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팩트체크(Fact check)’ 부서를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보도 전 자사 보도의 출처, 사실 여부 등을 내부에서 사전에 철저하게 검증하자는 취지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한 뉴스의 빠른 확산을 고려해 팩트체크의 속보성도 강화하고 있다. NYT에는 정정 보도에 관한 ‘5초 룰은 없다’는 얘기까지 있다. ‘오류는 발견 즉시 수정해야 한다. 다음 날 신문을 낼 때까지 기다려선 안 된다’는 의미다.
2016년 대선 이후 사전 팩트체크는 더 중요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NYT, 워싱턴포스트(WP), CNN 등을 ‘가짜뉴스’ ‘시민의 적’이란 원색적 표현으로 공격하고 있다. 사소한 실수만 해도 대통령이나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NYT 워싱턴지국은 2017년 오류 등을 점검하는 ‘팩트체커’를 자체 고용하고 있다. 전문 팩트체커가 기자들의 기사 작성 단계에 개입해 오류를 찾아내 기사 출고 전 오류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가동 중이다.
미 언론계는 미 3대 팩트체크 전문기관으로 WP의 ‘팩트체커’, 펜실베이니아대가 지원하는 ‘팩트체크닷오아르지’, WP 기자 출신인 빌 어데어 듀크대 교수가 2007년 만든 ‘폴리티팩트(POLITIFACT)’를 꼽는다.
2011년 출범한 ‘팩트체커’는 이라크전쟁을 정당화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 주장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범했다. 자체 웹사이트에 관련 기사와 칼럼을 올리고 거짓말 수위에 따라 ‘피노키오’ 등급을 1개부터 4개까지 매기는 독특한 방식으로 출범 때부터 주목받았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의 이미지를 활용해 팩트체킹에 대한 독자의 흥미와 호기심을 높인 셈. WP는 1일(현지 시간) 취임 802일째를 맞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터뷰와 연설 등을 자체 팩트체커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분석한 결과, 거짓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이 9451건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미국 팩트체크 전문기관 폴리티팩트는 “푸에르토리코가 허리케인 구호자금으로 910억 달러를 받았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3일 트윗을 ‘거짓(False)’, “바람이 없는 날 전기도 끊긴다”며 민주당 일각에서 주장하는 재생에너지 중심의 ‘그린 뉴딜’ 정책을 조롱한 같은 날 트윗은 ‘대부분 거짓(Mostly False)’으로 평가했다. 폴리티팩트 화면 캡처
○ 각국 정부·소셜미디어의 협력도 필수
가짜뉴스 대응에 각국 정부, 거대 소셜미디어 회사 등의 협조가 시급하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엘릭 NYT 책임프로듀서는 “러시아의 허위 정보에 익숙한 동유럽은 범국가 차원에서 가짜뉴스 대책을 마련한다”며 “러시아의 거짓말을 전문으로 다루는 방송 프로그램, 악의적 허위 정보를 사이버 테러로 규정한 정부 정책, 가짜뉴스 웹사이트에 광고를 거부하는 기업들이 대표적”이라고 전했다.
언론들이 가짜뉴스의 진위를 계속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대중이 가짜뉴스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도 나온다. 최근 방한한 앤드루 윌슨 전 영국 스카이뉴스 앵커(59)는 “2016년 7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당시 ‘매주 3억5000만 파운드(약 5249억 원)가 영국에서 EU로 간다. EU를 탈퇴하면 그 돈을 영국민 의료에 쓸 수 있다’는 가짜뉴스가 있었다”며 “언론이 이 주장을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오히려 일부 대중이 ‘이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가짜뉴스를 원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차라리 소외 계층을 위한 뉴스, 지역 언론 활성화 등으로 돌파구를 찾자”고 주장했다. 가짜뉴스의 범람이 양극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확산과 무관치 않은 만큼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모두를 위한 뉴스’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윌슨 전 앵커는 “영국 언론 역시 수도 런던에 거주하는 중산층에 관한 뉴스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므로 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며 “상당수 영미권 가짜뉴스는 극좌 혹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소외계층을 선동하기 위해 만들고 퍼뜨리는 감정적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뉴욕=박용 parky@donga.com /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 위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