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충남 서산 ‘백제의 미소’|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올려다 보며 대화하는 보원사 주지 정범 스님(왼쪽)과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 1959년 지역 나뭇꾼이 당시 부여박물관장에게 바위 벼랑에 산신령 조각이 새겨져 있다고 귀띔하면서 ‘백제의 미소’가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충남 서산 운산정류소. 택시로 10분을 더 달려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입구에 닿았다. 저 멀리 크게 팔을 흔들어 환대하는 스님들이 보인다. 내포문화사업단 공동대표 정범 스님과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다.
합장을 나눈 뒤 짧은 계단을 오르자 목탁 소리가 산세를 울렸다. 가까이 가야산이 병풍을 둘러 아래위로 초록빛이 펼쳐진다. 유배지에 불시착한 듯 비현실적인 풍경 사이로 ‘백제의 미소’가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삼존상은 아침엔 햇살이 드리워 은은하고, 정오엔 음영이 두드러져 입체적이며, 저녁엔 그늘이 져 근엄하다. 각기 다른 시간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방문객이 불상이 훼손된 줄 알고 관리자에게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황량한 보원사지 발굴터에는 당간지주, 법인국사 보승탑 등 고려시대 유적이 남아 있다(왼쪽 사진). 수덕사 초입에 자리한 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전쟁을 피해 살던 곳이다(오른쪽 사진).
절터 귀퉁이에 흙빛을 머금은 석돌 수백 개가 가지런히 누워 있다. 한때 위풍당당하게 사찰을 지탱했을 유적들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꽤 번성했던 절로 짐작된다. 대웅전의 철조여래좌상은 현수막에 박제된 신세로 손님을 맞고 있다. 현재 좌상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덤불이 성성한 이곳은 한때 사람과 물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바다에서 이어진 강줄기는 가야산 곳곳을 파고들었고, 10여 개 마을이 군락을 이뤄 내포지구를 형성했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보부상들이 다니던 길입니다. 중국에서 내륙으로 가려면 이곳 내포를 거쳐야 했죠.” 정범 스님의 설명이다.
30여 분 이어진 길 끝자락에 천주교 성지가 있다. 과거 천주교 사제들이 바닷길을 따라 이곳에 다수 정착했고, 박해 때마다 지역 신자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불교와 천주교 양측에 의미가 깊은 장소인 셈이다.
야트막한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언덕 중간쯤에서 만난 고즈넉한 정자. 주먹밥으로 요기를 한 뒤 다시 채비에 나선다. 그늘을 치고 앉을 공간이 중간중간 선물처럼 등장해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가면 좋다.
가야산 자락에 자리한 남연군 묘 앞으로 등산객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최근까지 묏자리를 몰래 파는 사람이 많아요.” 지나가는 어르신이 한마디 던진다. ‘불법 묘지 금지’라는 현수막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언덕을 바라보는 벤치에 오래 앉아 볕을 쪼이러 다시 오리라, 한참 다짐하고선 발걸음을 돌린다.
수덕사는 천천히 돌아보면 1시간도 부족하다. 다양한 조형물이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웅장한 사찰 구석구석을 둘러 대웅전을 만났다. 화려하게 새 옷을 덧입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소담하고 예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았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처럼 나무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오랜 세월 수많은 마음이 모아둔 간절한 기도가 산이 되고 나무로 꽃으로 피었네요.” 누군가가 가만히 말했다. 그림 같은 수덕사를 뒤로하고 찬찬히 터미널로 발걸음을 돌린다. 직관 한 번으로는 부족한 여정이다.
추천 코스 오전 8시 서울 출발∼오전 10시 충남 서산 도착. 서산 마애여래삼존상∼보원사지∼가야사지(남연군 묘)∼수덕사를 거쳐 저녁에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 가는 법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에서 서산태안행 버스를 타고 운산정류소에서 하차. 1시간 20분 소요. 7600원. 운산정류소에서 용현계곡행 시내버스로 보원사지 하차. 20분 소요. 1200원. 택시로는 10∼15분 소요. 8000원.
주변 맛집 △용현집: 민물고기 미꾸라지 등을 갈아 넣어 만든 어죽이 일품이다. 운산면 용현리 5-3 △길따라 인연따라: 운치 있고 인심 넉넉한 찻집. 금∼일요일에만 문을 연다. 천년고수 보이차 1인분 2만 원. 덕산면 상가2길 9-15
감성+ △책: ‘길 없는 길’(최인호). 수덕사를 배경으로 경허와 만공 스님의 생애를 다룬 소설(동아일보 문화부 추천). △영화: ‘명당’(감독 박희곤).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지의 명당으로 이장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입혔다(동아일보 문화부 추천).
서산=이설 기자 snow@donga.com
사진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사진 이훈구 기자 uf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