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 기업과 직장인 이야기
연말정산을 위해 올 초 근로소득원천징수 명세서를 뗀 국내 정유업체 이동민(가명) 부장의 시선은 한동안 소득명세 항목 ‘합계’에 머물렀다. 고향을 떠나 울산 사업장 기숙사 생활을 하며 초봉 3000만 원 언저리에서 시작해 ‘기름밥’을 먹기 시작한 지 15년 만에 이룬 억대 연봉이다. “시간외수당, 성과급 다 합친 거고 어차피 세금 떼고 보험 나가고 하면 실제로 받는 돈은 1억 원은 한참 멀었어요.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요즘 물가로는 1억 원으로 서울시내 ‘아파트 방 한 칸’도 사기 힘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부분의 샐러리맨에게 ‘억대 연봉’은 로망이다. 누군가는 이미 이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곧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고지다.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만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일각에선 “대기업에서는 버티기만 하면 받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진짜 ‘억’ 소리 날 만큼 일한 것 같아요.”
○ 임금 근로자의 3∼4%가 억대 연봉
국내 ‘억대 연봉자’는 얼마나 있을까. 우선 국세청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국세통계연보’를 보면 2017년 귀속연말정산 신고 근로자 중 총급여가 1억 원을 초과하는 이는 71만9000명이다. 전년(65만3000명) 대비 약 10.1% 증가했다. 전체 신고 근로자 1801만 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로 2016년에 비해 0.3%포인트 늘었다. 이인희 국세청 사무관은 “국외근로 등 비과세 대상 소득이나 임대업 등 개인사업을 겸해서 벌어들인 소득은 제외한 급여”라고 설명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1월 고용노동부의 ‘고용실태별 근로형태조사’에서 임금근로자 1519만 명의 기초자료에 따르면 1억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이는 2017년 기준 44만 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2.9%를 차지해 좀 더 비중이 낮다. 고용부의 조사는 공무원이나 조사 기간(6월)에 재직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제외되기 때문에 국세통계연보에 비해 근로자 수가 더 적다.
두 조사를 종합하면 억대 연봉은 전체 봉급생활자의 3∼4%다. 통상적으로 1000명 이상 임직원을 고용하는 대기업 기준으로 직원 수의 1∼2%를 차지하는 임원이 아니더라도 억대 연봉의 기회는 있는 셈이다.
“많이 받는 만큼 많이 써야 더 많이 들어온다”는 이들도 있다. 개인의 여가나 가정을 위한 소비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맥 관리에 그만큼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중소·중견 광고대행사들을 거쳐 대기업 광고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한 기획자는 “객관적으로 업무역량이 뛰어나다면 연봉 상승의 비결은 승진보다 이직”이라며 “다른 회사가 나를 원하게 만드는 것이 몸값 점핑의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들 억대 연봉자의 통장에 ‘꽂히는’ 실수령액은 1억 원이 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소득근로세율을 보면 종합소득과세표준 8800만 원 초과∼1억5000만 원 이하 연봉자들의 경우 8800만 원 이하 금액에 대한 세액인 1590만 원에 8800만 원의 초과분에 대한 세율 35%를 더한 금액이 근로소득세로 부과된다. 세전 1억 원 연봉의 경우 2010만 원이 부과되는 셈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총연봉이 세전 1억3000만 원 이상이어야 세후 수령액이 1억 원을 넘을 수 있다.
○ 정유업계 고연봉 비결은 ‘장치산업+구조조정 경험 없기 때문’
이 외에도 삼성전자(1억1900만 원), SK하이닉스(1억737만 원) 등 반도체 기업들은 ‘업황 특수’를 톡톡히 누린 경우다. 삼성전자는 2013년 평균 연봉이 처음으로 1억 원을 넘긴 이후 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지난해까지 5년 연속 상승세를 기록했다.
같은 대기업이라도 회사마다 차이가 크다. 삼성 관계자는 “전자 등 주요 계열사의 경우 부장 3, 4년 차가 되면 계약연봉이 9000만 원을 넘고 성과급을 포함하면 1억 원을 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반면 삼성을 제외한 5대 그룹의 한 계열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에선 임원이 아닌 평직원의 1억 원은 뛰어난 실적을 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허상’에 가깝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8952만 원) 같은 정보기술(IT) 회사에선 하나의 제품만 대박을 치면 단번에 억대 연봉자가 될 수도 있다. 크래프톤(옛 블루홀)은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가 히트하면서 지난해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한 개발자 등 일부에게는 최대 50억 원,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3000만 원의 보너스를 제공했다. IT 업계 관계자는 “게임회사에선 프로젝트 시작 때부터 대규모 보너스 지급 방침을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