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이철희]‘중재자’ 문재인의 자격

입력 | 2019-04-10 03:00:00

작년 5월24일 訪美귀국날의 악몽…고달픈 ‘완충자’ 신세로는 안 된다




이철희 논설위원

오늘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작년 5월 24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그날 문재인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새벽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체류 24시간, 왕복 비행 30시간이 넘는 1박 4일의 이례적 일정이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도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나 트럼프의 원맨쇼에 가까운 기자회견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앉아 지켜보면서 느꼈을 씁쓸함이란 쉽게 씻기 어려웠을 터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을 그날, 문재인은 지옥과 천당을 왔다 갔다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침 일찍 들려온 소식은 북한의 원색적인 미국 비난 담화였다. 북한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하며 호기롭게 ‘핵 대결’까지 경고했다. 가뜩이나 6월 12일로 잡힌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두고 “열리면 좋지만 안 열려도 괜찮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단 북한을 믿어보자며 설득했을 문재인으로선 불안감을 씻어내기 어려웠으리라.

이어 낮부터 들어온 소식은 잠시 그런 불안을 내려놓게 했다. 북한이 약속한 대로 풍계리 핵실험장 시설을 폭파했고, 저녁엔 북한의 공식 발표도 나왔다. 하지만 밤늦게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전격 취소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청와대는 발칵 뒤집어졌다. 문재인은 참모들을 관저로 긴급 소집하고 자정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도 열었다. 이 모든 게 귀국한 지 24시간도 안 돼 벌어진 일이다.

다행히도 이튿날 김정은이 자세를 한껏 낮춘 담화를 내고, 트럼프가 곧장 “좋은 소식”이라고 화답하면서 한바탕 소통은 일단 진정됐다. 그 다음 날 문재인은 전격적으로 두 번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김정은이 그간 거부했던 북-미 협상과 남북 회담 재개 확답을 받아냈다. 하지만 북-미 사이에 낀 존재로서 한순간에 속수무책의 처지에 빠질 수 있음을 실감한 그날의 경험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을 것이다.

이번 1박 3일 워싱턴행(行)에도 만만찮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노이 결렬 이후 멈춰선 대화의 복원을 위해서지만 자칫 팽팽한 북-미 간 갈등 속에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거나 양쪽에서 뒤통수를 맞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이쯤해선 그간의 역할을 다시금 되짚어봐야 한다. 아슬아슬한 위기 때마다 불을 끄는 데 존재감을 발휘했지만, 한반도의 당사자로서 진정한 중재자 역할을 했는지 말이다.

양측을 한자리에 앉히는 데만 급급했을 뿐 나머지는 둘 사이에 맡겨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당장의 합의만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줄곧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얘기하면서 정작 한미 관계는 빠뜨리며 트럼프와의 만남을 거북하게 여겼던 것은 아닌지. 그러니 북-미가 뭐라도 안 풀리면 늘 닦달하거나 눈 흘기는 대상이 된 것은 아닌지….

중재자나 촉진자 그 명칭이 뭐든 중간에 있는 사람은 늘 고달플 수밖에 없다. 아쉬우면 찾는 존재라지만 샌드백이나 쿠션 같은 ‘완충자’ 신세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문재인은 어제도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 서겠다”고 했다. 사실 그런 자신감도 거슬러 올라가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해결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토로했던 게 재작년 하반기다.

중재자의 힘은 자신감이나 절박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신뢰감에서 나온다. 하노이 결렬의 근본 원인도 북-미가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불신 속에 등진 양측을 되돌려 앉히려면 적극적 중재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이번 트럼프와의 만남에서 북한 비핵화의 목표부터 공유하고 중재자 자격을 확인받아야 한다. 김정은은 다음 문제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