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1938년 임정 예산 57만 위안… 64%가 독립투쟁 위한 軍費

입력 | 2019-04-10 03:00:00

[2019 3·1 운동 임정 100년/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서 살펴보니




《 100년 전 오늘 중국 상하이에서 첫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다. 이후 임정은 오늘날 정부가 국회에 하는 것처럼 임시의정원에 예산안을 제출하고 승인받았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예산 문서를 분석한 결과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 1개 연대를 창설하고자 했던 임정의 군사비 예산 책정 규모와 해외동포 성금 등 새로운 면모가 확인됐다.》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예산의 60%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한 군비(軍費)로 편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주 동포 등이 보내온 독립성금은 임정 운영에 실제로 큰 힘이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10일) 및 임시정부 수립(11일) 100주년을 앞두고 1935년 이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예결산서 중 일부를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예산정책처는 “임정은 임시의정원의 예산안 심사와 확정, 정부의 집행, 회계검사·결산 등 체계적 재정 체계를 갖췄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1938년 임정이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세입세출 예산서 총액은 57만8867.88위안이었다고 밝혔다. 계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당시 환율과 하급 공무원 임금 수준 등으로 보아 이를 오늘날 60억 원 정도 가치로 추정했다. 임정은 이 가운데 63.9%에 이르는 37만 위안(약 38억 원)을 군비와 군훈비(軍訓費·군사훈련비)로 편성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임정은 1000명 규모의 1개 연대와 장교 200명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은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했던 지청천 유동열 장군 등으로 급히 군사위원회를 꾸리고 군사사업비를 편성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이 중국 창사에서 광저우 류저우로 피란하는 비용으로 쓰였고, 바로 군을 창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창설했다.

예산정책처가 이번에 분석한 자료는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1877∼1946)이 1945년 환국하며 가져온 임시의정원 문서다. 홍진 선생의 손자며느리 신창휴 씨(85)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온전히 간직해 온 임시의정원 관인을 10일 국회에 기증한다. 기증식은 이날 국회에서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과 함께 열린다.

1938년 임정 예산서에는 미주, 하와이 등에 사는 동포들의 피땀 어린 독립성금이 드러나 있다. 임정은 혈성금, 애국금, 후원금 등 7만1086위안과 역시 사실상 성금인 인구세(인두세) 2600위안 등 오늘날 가치로 7억여 원(추정)의 성금 세입을 예상했다. 전체 세입 예산의 대부분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을 지원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금(50만 위안)이었다.

“임시정부를 후원한 미주, 하와이 동포들이라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에서 시신을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배 속에, 바다에 떨어지면 물고기 배 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백범일지’에서)

백범 김구는 만약 자신이 생전 독립한 나라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죽음의 방식은 이런 것이기를 소망한다고 1942년 썼다. 일제 탄압으로 국내 연락망인 연통제가 1921년 소멸된 뒤 해외 동포들의 후원은 임정 운영에 그만큼 긴요했다.

한편 1940년대 임시의정원 의원은 거마비 외에는 급여가 없었다고 예산정책처는 밝혔다. 의장, 부의장, 비서장, 비서 등만 급여를 받았을 뿐이다.

한시준 교수는 9일 국회도서관 주최 국제 학술 세미나에서 오늘날 ‘국회’라는 명칭이 1919년 임시의정원이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에서 비롯됐다고 밝혔다. 국회는 나라마다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지만 제헌국회에도 ‘국회’라는 명칭 결정 기록이 없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규정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