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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는 임금문제 협력하고 정부는 규제 풀고… 日 자동차의 부활

입력 | 2019-04-11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100년에 한 번 찾아올 대변혁… 실적 상승기에도 위기 대비
노사는 대립 거두고 정보공유, 기업은 정부 믿고 기술개발 전념




일본 자동차 기업의 합종연횡식 협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12일 미쓰비시자동차와 닛산, 르노는 공동 차량 개발과 부품 조달 등을 진행하기 위한 새로운 회의체를 만들기로 했다. 왼쪽부터 티에리 볼로레 르노 최고경영자(CEO)와 장도미니크 세나르 르노 회장,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 사장, 마스코 오사무 미쓰비시자동차 회장. 아사히신문 제공

박형준 도쿄 특파원

“여러분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도요타는 종언(終焉)을 맞이할 겁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요타자동차 노사가 임금협상을 타결했던 지난달 13일, 최고경영자(CEO)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 사장이 노사 대표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며 이례적인 강한 톤으로 위기감을 강조했다.

도요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실적을 살펴봤다. 2017회계연도(2017년 4월∼2018년 3월) 기준 매출액(29조3795억 엔·약 299조 원), 순이익(2조4940억 엔)은 모두 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2018회계연도 예상 실적도 그리 나쁘지 않다. 순이익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매출액은 전년도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위기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동차 전문가들은 CASE(Connected·연결, Autonomous·자율주행, Shared·공유, Electric·전기)를 배경으로 제시한다. 전대미문의 실적 호조에 자칫 방심하다간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위기를 자각하면, 그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도요타를 비롯한 혼다, 닛산 등 일본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CASE 대응에 사활을 걸고 있다. 회사 혼자서 뛰는 게 아니다. 노조와 정부도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다.


○ 노조, 춘투 때에도 ‘협력 모드’

“일단 고함부터 한번 지릅니다. 자리도 몇 차례 박차고 나가고. 협상 횟수가 10회 넘어갈 즈음 공장 라인을 세웁니다. 사측이 당해 낼 수 없어요.”(한국 자동차업계 관계자)

“임금협상 타결요? 언제 될지 모르죠. 1년 넘기는 경우도 허다한데요. 파업 때마다 그 현장 찾아가면 일 못 할 걸요. 소규모 파업이 워낙 많아서.”(한국 조선업계 관계자)

한국에서 산업계 춘투를 취재할 때마다 자주 듣던 말이다. 한국의 전투적 노조, 귀족화한 노조를 보면서 사측에선 신세를 한탄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런 장면이 익숙했기 때문인지 지난달 6일 아이치(愛知)현 도요타 본사에서 열린 노사협상의 모습은 너무나 색다른 광경이었다.

‘ㄷ’자 모양의 테이블은 양쪽 끝부분이 매우 길게 만들어진 구조였다. 한쪽에 사측 20명, 맞은편에 노조 측 20명이 앉았다. 그 뒤로 2열로 맞춰 테이블 없이 노사 양측 직원들이 약 40명씩 앉았다. 협상 쟁점은 ‘임금’이었다.

“일률 인상이 어렵다는 인사제도가 우려된다.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모든 노조원에 대한 일률 인상을 원한다.”(노측)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한다는 게 회사의 기본 원칙이다.”(사측)

노조는 월 기본급 1만2000엔(약 12만3000원) 인상과 일시급으로 월급 6.7개월분을 요구했다. 반면 사측은 차등 인상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의견이 180도 달랐지만 양측이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임금협상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오너 4세인 도요다 사장이 사측을 대표해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심판’ 역할을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다 갑자기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이 이어졌다. 도요다 사장이 “이번처럼 (노사 간) 거리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정도로 의견 차가 크게 나느냐”며 화를 내듯 말한 것이다.

그 뒤에 나온 니시노 가쓰요시(西野勝義) 노조 집행위원장의 발언에 기자는 또 한 번 놀랐다. “도요타의 상황을 가볍게 보는 직원은 한 명도 없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회사의 위기감을 사업장으로 돌아가 조합원들과 공유하겠다.”

일주일 뒤 도요타 노사는 당초 노조 요구보다 1300엔 낮은 1만700엔 기본급 인상, 일시급 3.24개월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가을 노사교섭 때 협의하기로 했다(기본급 500만 원을 받는 근로자는 500만 원×3.24에 해당하는 1620만 원을 받는다). 또 성과보상 시스템을 만들 ‘전문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노사 양측의 주장이 잘 반영된 셈이다.

일본에서도 고도성장기인 1960년대와 70년대는 전투적 시위가 흔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반나절 이상 데모한 횟수는 1960년 1053건(참여자 91만7454명)에 이어 1974년(5197건, 362만283명)에 정점을 찍은 뒤 가파르게 줄었다. 2010년엔 38건(2480명)에 그쳤고, 지금은 ‘춘투 시위’가 거의 사라졌다.

미나가와 히로유키(皆川宏之) 지바대 교수는 “학력 수준이 높아진 대기업 노조는 경영진과 상호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다”며 “요즘은 노사가 대립하기보다는 상호 정보 공유, 의사소통, 협력이 제도화돼 있다”고 말했다.


○ 일상화된 ‘적과의 동침’

노사가 협력하면 사측의 어깨도 가벼워진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지난달 20일 도요타는 핵심 기술인 하이브리드차(HV) 시스템을 스즈키에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요타가 지금까지 자본 투자를 한 마쓰다와 스바루 이외의 다른 자동차 기업에 HV 기술을 제공하는 것은 처음이다. 요미우리신문은 “호랑이 새끼(일본에선 ‘매우 귀여워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를 스즈키에 제공해 HV 시장 자체를 키우겠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스즈키의 스즈키 오사무(鈴木修) 회장은 “HV 기술까지 사용하게 해줘 감사하다”고 밝혔다. 경쟁사가 아니라 그룹 내 자회사끼리 협력하는 느낌이다.

지난해 9월 혼다자동차와 미국 GM이 자동운전기술 분야 제휴를 발표했을 때 ‘적과의 동침’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혼다는 자동운전 분야의 GM 자회사 크루즈홀딩스에 7억5000만 달러(약 8511억 원)를 출자하고, 차세대 기술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구글이나 애플 등 대형 정보기술(IT) 업체가 주도했던 자율주행 분야에서 혼다는 약자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경쟁사의 자회사에 투자한다는 결정은 과감한 행보였다.

르노-닛산-미쓰비시 동맹은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외적으로 강력한 협력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지난달 12일 장도미니크 세나르 르노 회장, 사이카와 히로토(西川廣人) 닛산 사장, 마스코 오사무(益子修) 미쓰비시자동차 회장은 요코하마 닛산 본사에서 서로 손을 맞잡았다.

자동차 회사가 자사(自社) 자원, 인력만으로는 CASE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 자동차업계의 선택은 경쟁력을 높이고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일본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은 ‘하늘을 나는 자동차’의 실용화를 준비하는 단계다.


○ 정부의 ‘2인 3각’ 후방 지원

2016년 10월 도요타와 스즈키가 협력 강화를 발표하며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사장, 스즈키 오사무 스즈키 회장(왼쪽부터). 아사히신문 제공

지난해 4월 18일 도요다 사장, 가와구치 히토시(川口均) 닛산자동차 전무, 고가이 마사미치(子飼雅道) 마쓰다 사장 등 일본 자동차업계 수장들은 도쿄(東京) 경제산업성의 한 사무실에 모였다. 회의 주제는 ‘자동차 신시대 전략회의’.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이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새 연료전지에 대한 기초기술개발, 충전과 리사이클에 관한 인프라 구축을 통해 공동으로 완성차를 만들자고 유도했다. 업체마다 자체적으로 개발하면 비용과 시간 낭비가 크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기업의 비효율을 줄이고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불확실성이 높을 때는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컨대 수소차와 수소충전소는 닭과 달걀의 관계여서 어느 한 측이 선행되면 나머지는 따라 온다. 일본 정부는 수소충전소 설립에 방점을 찍었다. 민간기업이 수소충전소를 설립할 때 보조금을 지급하고, 충전소가 도심에 세워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규제를 완화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정부를 믿고 수소차 개발에만 전력투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변혁기를 공격의 기회로 삼고 혁신을 만들어 내자.”

자동차 신시대 전략회의에서 세코 경제산업상은 이처럼 말했다. 잘나가는 상황에서도 위기감을 강조하는 일본 자동차 기업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일시급 ::

연간 1회 혹은 2회 지급되는 ‘보너스’. 일본 노사는 매년 춘투 때 기본급 인상과 일시급 규모를 중요하게 협의한다. 일시급은 근로자 월급을 기준으로 직급, 업무에 따라 차등 지급되는 게 일반적이다. 도요타 노사는 올해 두 차례에 걸쳐 일시급을 지급하겠다고 합의했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