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中에 있다는 소식 듣고 나라망한 백성 아니다 싶어 감격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존재가 희망”
8일 한국광복군 생존자 김영관 옹이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1944년 당시 중국의 광복군 활동 지역을 설명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임정(臨政)은 충칭에 있다.’ 가슴에 은밀하게 품고 있던 이 한마디가 1944년 12월 그를 한국광복군으로 이끌었다. 광복군은 1940년 임시정부 정규군으로 창설돼 연합군 일원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11일)을 사흘 앞둔 8일 만난 광복군 출신 김영관 옹(95)은 70여 년 전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듯했다. 현재 광복군 생존자는 20명이다.
경기 포천에서 태어나 서울 선린상업학교를 나온 김 옹은 1944년 9월 일본군 징집통지서 ‘아카가미(赤紙·빨간 종이)’를 받았다. 함흥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은 후 중국 저장성 둥양(東陽)현 일본군 제43부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죽더라도 일본을 위해 죽고 싶진 않았다.
기회를 노리던 그는 그해 12월 3일 부대를 빠져나왔다. 장시성 옌산(鉛山)에 있던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합류한 것은 이듬해 2월이었다. 그때 처음 사괘(四卦)가 그려진 태극기를 봤다. “예닐곱 명이 영국 민요라는 애국가를 부르고 광복군 소대장이 태극기를 들고 우리를 데리러 왔을 때, 그 마음으로 평생 살려고 했습니다.”
오전에는 조선 역사 등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하던 20여 명은 일본군 기습과 본토 진격을 한다는 목표로 뭉쳤다. 그러나 광복이 되면서 김 옹은 1946년 3월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김 옹은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했는데 한 가지, ‘반성’이 빠졌다”며 “우리가 왜 3·1운동을 하게 됐는지, 왜 임시정부가 생겼는지, 지금은 망국의 원인이 고쳐졌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유공자 처우에 대해서는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광복회의 단체 지위를 격상해 주는 등 명예롭게 대우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옹은 포천 영평보통학교 시절의 동아일보도 기억했다. “다들 가난해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났다’며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는 질식할 것만 같던 일제강점기의 창문이자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