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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모인 어민, 日 추격에 배 몰고 나가 ‘선상 횃불시위’

입력 | 2019-04-13 03:00:00

[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1화> 경기도 고양




경기 고양시의 행주나루는 3·1운동사에서 드물게 선상 만세시위가 펼쳐진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행주산성에서 만세를 부른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추격에 행주나루로 내려와 강에서 배를 타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2015년 행주나루터에 모인 주민들이 당시 만세시위를 재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행주나루는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경기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현재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로 건너가던 배들의 선착장이었다. 지금은 역사적인 유물이 된 행주나루터를 3일 방문했을 때 몇 척의 배가 보였다. 어선이었다. 어부들은 이 배들을 이용해 자연산 민물장어, 참게, 숭어, 황복 등을 잡아 올려 생계를 꾸려간다.

행주나루는 삼국시대부터 어업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곳이다. 100년 전 3월 행주나루에서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만세를 부른 것도 고기를 잡아 온 어부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선상 만세시위의 현장이었다.



○ 선혈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만세를 쓰다

1919년 3월 1일 고양군 연희면 양화진에서 주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주둔 헌병대에 의해 10여 명이 체포됐다.(이정은 지음 ‘고양독립운동사’) 같은 날 용강면 동막리에서도 주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서울과 동시에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고양은 지리적으로 서울과 밀접한 지역이었다. 특히 고양군 연희면에 위치한 연희전문학교는 3·1운동 준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학생 대표들이 다니던 학교였기에 주민들의 민족의식은 민감했다.

용강면 동막리에 살던 정호석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도했던 사람이다. 그는 덕수궁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조선총독부 순사보였다. “3월 1일이라 열광한 군중은 대한문을 넘쳐 덕수궁내로 밀물같이 밀어들었다. … (정호석) 씨는 그날 시민의 열성에 깊이 감동된 바 있어 가만히 집으로 돌아가….”(독립신문 1919년 9월 13일자)

나흘 뒤 정호석은 창덕궁 경찰서장에게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얻어 집으로 온다. 잡화점에서 45전을 주고 산 광목 한 자를 들고서다. 아내에게 접시를 가져오게 해서 칼을 뽑아 무명지 손가락을 베려고 했지만 아내와 어머니가 극구 말렸다. “재차 입으로 무명지를 잘라 흐르는 선혈로 양목 2폭에 그리니 하나는 태극기요 하나는 독립만세의 4자러라.”(독립신문) 그는 대나무 막대기에 광목을 매어서 깃대를 만들어서는 그것을 가지고 동막리 흥영여학교로 향했다.

정호석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때 가장 먼저 동참한 사람은 흥영여학교에 다니던 그의 딸이었다. 이어 교직원과 학생 80여 명이 학교에서 나와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공덕리까지 행진했다. 체포된 정호석이 검사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은 극적이다. “국기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파리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을 독립시킨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봤다. 조선도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다.” “독립만세를 부르면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각오하고서 한 일이기 때문에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 배 위에서 부른 “대한독립만세!”

선상 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열흘 만이었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행주나루 인근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1890년 세운 행주교회, 1909년 건립된 행주성당이 있었다. 행주나루는 서해와 강화 지역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수로의 중심 포구.나루를 통해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정보가 빠르고도 풍성하게 전달될 수 있었다. 교회와 성당이 일찍이 세워진 것은 주민들이 그만큼 빠르게 신문물을 접하면서 근대화 의식에 눈떴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행주나루는 도산 안창호와 단재 신채호 등이 1910년 목선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한 곳이기도 하다. 망명 때 안창호가 지은 거국가(去國歌)를 적어 넣은 안내판이 선상만세운동의 기록을 담은 안내판과 함께 행주나루터에 서 있다. 그만큼 중요한 독립운동사의 현장이다.

경기 고양시 주민들이 행주나루터에 배를 띄우고 선상 만세시위를 재현하는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3월 11일 밤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 마을 주민들은 행주산성에 올라 등불을 올리고 야간 시위를 벌였다.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이 왜군을 대파한 곳으로 항일 승전 역사의 현장이다. 한자리에 모인 군중은 불빛과 만세 소리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을 향해 “옛날 임진년에 이곳에서 왜놈들이 망했다고 하거니와 만일 쫓아오면 네놈들도 그와 똑같이 망하리라”고 외친다.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주민들은 산에서 내려와 나루로 와서는 배를 타고 만세운동을 벌인다. 주민 대부분이 강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기에 개인 배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배에서 내려 체포된 것은 일본 경찰이 부인과 자녀 등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중면 일산리 장날 만세운동은 고양 지역 최대 규모 만세운동으로 꼽힌다. 근대문화재가 된 경의선 일산역 인근 오일장이 서는 그곳이다. 경의선 역시 김상옥 의사 등이 중국에서 경성으로 잠입할 때 이용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루트였다. 이곳에서 3월 25일 주민 16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해산했다. 장날 전날 벌어진 이 시위에 대해 중면 면장은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강경하게 말하면서 헌병주재소에 주민 동향을 보고했다. 그러나 면장의 태도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은 컸다. 오히려 다음 날 거센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동기가 됐다.

3월 26일 일산리 장날, 한자리에 모인 주민 500여 명은 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의 과잉 진압에 굴복하지 않고 근처 일본인 가옥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은 사흘째 되는 날까지 이어져 150여 명이 늦은 밤까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횃불 만세운동은 같은 날 벽제면 대자리에서도 일어났다.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은 ‘3월 26일 벽제면 대자리 응봉산(대자산)에 수십 명의 주민들이 올라가 불을 피우고 다음 날까지 만세를 불렀다. … 3월 27일에는 벽제면 관산리 가장곡산에서 주민 30여 명이 밤을 새우며 만세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촌리 당재의 횃불시위(3월 22일), 은평면 신사리의 월암산 시위(3월 23일) 등 산 위에서 시위가 이어진 뒤였다.

고양 둑도면 시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둑도면은 오늘날 뚝섬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3·1운동 당시 고양군은 지금보다 면적이 크게 넓었다. 동대문 밖으로는 고양 숭인면이었다. 한지면은 왕십리에서 이태원까지 걸쳐 있었다. 그 너머로 둑도면이 있었다. 서쪽으로 마포까지는 경성부, 애오개부터는 고양군 용강면이었다. 아현북리(지금의 북아현동)는 연희면, 모화관 고개를 넘으면 은평면이었다. 당시 고양군은 경성부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고양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지원 헌병이 긴급하게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기 때문에 지역사회가 조직적으로 연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만세운동에 예민하게 반응한 민중 대부분이 강렬한 저항 의식을 보여줬다는 특징이 있다. 둑도면 시위가 그랬다. 3월 26일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마차꾼 김완수가 시위대를 지휘하고 노동자였던 신원룡이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 앞에 이르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를 때 지원 나온 경성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김완수는 “피하지 말라, 피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군중을 지휘했다. 이때 시위자 중 사망자 1명, 부상자 5명이 발생한다. 일본 측은 헌병 오장(伍長) 1명, 상등병 2명, 소방수 3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날 만세시위로 체포된 사람은 100여 명에 이르렀다. 고양군에서 일어난 시위 중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고양독립운동사’)

둑도 시위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은 마차꾼, 소달구지꾼, 일용노동자들이 다수였다. 노동자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는 얘기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민족대표와 학생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시위가 기층 민중에게까지 파급돼 강력한 항일독립운동의 성격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특히 흥영여학교 시위를 주도한 조선총독부 순사보의 경우 독립운동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은 “3·1운동과 그 정신이 지식계급의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민중 속으로, 심지어 일제 관속에까지 내려갔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독립선언서 인쇄 주역… 행주로 귀향 후엔 애국-계몽활동 헌신 ▼

고양의 독립운동가 장효근 선생
민족의식 고취하려 행주서원 복원… 소작농 옹호-공립학교 설립 앞장

독립운동가 장효근(왼쪽)과 ‘장효근일기’ 표지. 동아일보DB 

‘장효근씨 사회로 의사를 진행하야 만장일치로 고양군 행주기공사 수리기성회를 조직하고 본사 편집국장 이광수씨의 강연이 있고 이어서 즉석에서 의연금 157원을 거두고 6시에 폐회하였다.’

동아일보 1931년 8월 12일자에 실린 기사다. 행주기공사는 1842년 세워진 행주서원을 가리킨다.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된 행주서원의 수리·복원을 주도한 사람은 이날 수리기성회에서 사회를 본 고양 출신 독립운동가 장효근(1867∼1946)이었다. 정동일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은 “장효근 선생이 임진왜란 때 일본을 물리친 권율 장군을 기념하는 행주서원을 새롭게 다듬는 데 앞장선 것은 일제강점기 항일의식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장효근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의 만세운동 현장에 있었다. 3월 1일 종로 태화관과 탑골공원에 뿌려진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사람이 그였다. 3·1운동을 앞둔 2월 27일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의 인쇄 조판이 보성사에 전달됐다. 천도교인으로 천도교 직영 보성사에서 총무로 일하던 장효근은 직원들과 함께 비밀리에 인쇄기를 돌려 독립선언서 2만1000부를 찍어냈다.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 경찰들이 보성사에 들이닥쳐 장효근을 비롯한 직원들을 체포했고, 그는 5개월여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22년 제2의 3·1운동을 기획하다 일제에 발각돼 무산된 뒤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로 귀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다양한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다. 동학사상을 가르치는 서당을 열었고, 소작농민들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하도록 지주들을 설득했으며, 공립보통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천도교인이었음에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행주서원 복원에 앞장서는 등 구국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독립운동사자료집’)

1916년부터 194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쓴 ‘장효근일기’도 귀중한 자료다. 6·25전쟁 때 생가가 불탔지만 장남이 땅에 묻어놓고 피란해 보존될 수 있었다. 후손들은 독립기념관이 건립됐을 때 이 일기를 기증했다. 지난해 ‘항일독립문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고양=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