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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의 정수 보여주던 노트르담 지붕과 첨탑 화재로 사라져

입력 | 2019-04-16 20:30:00

널찍한 내부 공간 확보 위한 ‘플라잉 버트리스’ 효과적으로 활용한 건축물
대혁명 후 훼손되다가 나폴레옹과 빅토르 위고 덕분에 복원 여론 형성돼



15일(현지 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화재가 발생한 지 1시간 뒤 높이 90m 첨탑이 불타 무너지는 모습. 이 목재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었다. 파리=AP 뉴시스


15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발생한 화재는 후기 고딕 양식의 중요한 두 상징물을 무너뜨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푸른색 십자가를 연상시키던 중앙 예배 공간의 교차형 궁륭(아치 구조 천장) 지붕, 기괴한 가고일(괴물 석상)들 사이로 솟아 있던 높이 90m 목재 첨탑이 화재 발생 1시간여 만에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의 여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명칭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 착공돼 1345년 축성식을 열었지만 이후 다양한 건축 양식의 변화를 반영하며 개조됐다. 예배 공간이 증축돼 현재와 유사한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 초다. 아치 구조 지붕의 하중을 외부 벽체로 전달해 내부 공간을 넓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구조체인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를 효율적으로 활용한 건물로 평가된다.

건물 안에 들어선 방문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지름 9.6~13m의 대형 스테인드글래스 ‘장미창’도 훼손됐을 가능성이 크다. 착색유리를 납으로 이어 붙여 만든 스테인드글래스는 열에 취약하다. 첨탑의 목재 구조물, 지붕을 덮은 참나무 널판도 납으로 이어 붙인 것이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납이 녹이 건물 곳곳에서 떨어져나온 재료들이 낙하해 소방관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했다.

진화를 위해 물을 공중에서 대량으로 퍼부을 수 없었던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이 석재를 쌓아올려 아치 구조로 천장과 지붕을 형성하고 목재로 보강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건물은 현대의 철근콘크리트 건물과 달리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겪으면 구조물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영국과 백년전쟁을 치르던 중이던 1431년 영국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식을 연 치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456년에는 마녀로 몰려 1431년 화형당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후 교황청은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성상(聖像)을 예배당에 안치하도록 했다.

1789년 대혁명 직후에는 성당 정문 위 유대 왕의 석상들이 프랑스 왕 석상으로 오인받아 머리가 잘려나가는 등 공간이 심하게 훼손됐다. 학자들의 토론회장, 사료 보관소로 성격이 변질되며 철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던 중에 1804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열어 온 프랑스 왕가의 전통을 깨고 이곳에서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열어 가치를 회복시켰다. 1831년에는 이 성당의 열렬한 예찬자였던 빅토르 위고의 걸작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가 출간되면서 복원 여론이 더욱 힘을 얻었다.

그 후 1845년 복원 총감독으로 선정된 건축가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주도로 20여 년간 복원 공사를 진행해 제모습을 되찾았다. 비올레르뒤크는 이때 새로 만든 첨탑을 둘러싼 열두 사도의 석상 중 성 토마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복원된 첨탑 꼭대기의 수탉 모양 풍향계에는 성인들의 유골과 가시면류관 유물 일부가 부착돼 있었다. 베르디에 당시 파리 주교가 신도들의 안녕을 빌며 만든 이 풍향계도 화재로 영원히 사라졌다.

손택균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