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명지도 일대 영남 최대 생산지 ‘명지염전’ 실체 확인 함수 끓일 때 쓰던 소금가마도 발견 일제강점기 이후 천일염 나와 쇠퇴
낙동강 삼각주 남쪽에 위치한 부산 강서구 강동동에서 발견한 ‘명지염전’ 터. 문헌으로만 내려오던 한국 전통의 자염 생산시설이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경문물연구원 제공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부산 강서구 강동동(명지도) 일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부경문물연구원은 “지난해 낙동강 삼각주 내에 위치한 명지도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용한 명지염전 터를 찾아냈다”고 16일 밝혔다.
○ 한반도 전통 소금 ‘자염’
구한말 소금가마에서 작업하는 모습. 1907년 천일염이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는 소금가마에서 물을 끓여 소금을 얻는 자염이 주를 이뤘다. 부산박물관 제공
자염의 생산 과정은 먼저 약 3도의 염도를 띠는 바닷물을 농축시키기 위해 모래나 갯벌 흙을 햇볕에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 다음 여과 장치인 ‘섯구덩이’에 다시 흙을 쌓은 뒤 바닷물을 통과시켜 염도가 18∼19도까지 높아지는 함수(鹹水)를 만든다. 이 함수를 가마에 끓여서 만들어 낸 것이 자염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바닷물을 농축하던 염전 26개면과 해수를 끌어들이는 너비 3m 규모의 도수로(導水路) 1기, 이를 각 단위 염전에 공급하던 너비 1m 이하의 공급수로 4기를 확인했다. 또 인근 지역에서는 함수를 끓여냈던 소금가마 8기와 창고(염창) 시설로 보이는 건물지도 나왔다.
김기민 부경문물연구원 연구실장은 “지금은 전남 신안군 일대의 천일염전이 활발하지만 개항 이전 전통사회에선 동해안, 남해안 등 해안지역 대부분에서 염전을 조성해 자염을 생산했다”며 “자염은 물을 계속해서 끓여야 했고, 이를 위해 많은 연료가 필요했는데 명지도에는 갈대밭이 무성해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영남 최고의 소금 산지 ‘명지염전’
고산 자 김정 호 ( 1804∼1864)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명지도에는 ‘자염최성(煮鹽最盛)’이라고 기록돼 있다. 조선후기 명지도에서 활발한 자염생산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푸른역사 제공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명지염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명지도의 탁월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다. 부산 앞바다에서 유입되는 바닷물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육로 교통이 불편했던 조선시대 당시 상대적으로 운송이 용이했던 선박을 활용해 낙동강을 따라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소금이 귀한 영남 내륙 지역을 거대한 배후 소비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이에 1731년 영남 감진사(監賑使·기근이 들었을 때 지방에 파견하던 특명 사신)로 온 어사 박문수(1691∼1756)는 국가에서 명지염전을 활용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영조는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여 명지염전을 국가가 관리하는 공염(公鹽)으로 지정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부터 생산 원가가 저렴하고, 상대적으로 짠맛이 강한 천일염을 생산하면서 자염은 쇠퇴해갔다. 명지염전은 1933∼36년 낙동강 제방 공사를 진행하면서 전체 규모의 60%가량이 사라졌다. 광복 이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유승훈 부산시 학예연구사는 “서해안에 비해 조수간만의 차가 작은 낙동강 하구의 염전은 제방을 설치했다는 특징이 있다”며 “한반도 소금 역사를 알려주는 곳이라는 점에서 관련 유적지를 보존,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