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한인의 후손인 고려인은 현재 50여만 명에 달한다. 고려인이 즐겨 먹는 음식은 ‘밥이물이(물에 만 밥)’와 ‘짐치’다. 짐치는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젓갈 대신 후추와 상채(향채의 일종)로 맛을 낸 중앙아시아식 김치다. 집 근처 자투리땅에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재배해 가며 음식 문화를 지키려 노력한 결과물이다. 백태현 키르기즈한국대 교수는 “짐치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간 ‘김치 순례’의 첫 작품이다. 김치가 가야 할 길을 앞서 온 것”이라고 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고국의 문화를 지키며 끈끈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데에는 ‘고본질’이라는 특유의 영농 방식이 도움이 됐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거주 이전 제한이 풀리자, 고려인들은 먼 곳의 농지를 빌려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계절농업을 했다. 이를 고본질이라고 부른다. 친인척 및 지인을 중심으로 꾸려진 30∼50명 규모 공동체 ‘브리가다(작업반)’는 고본질의 중심이었다. 이 공동체는 한국 문화를 대물림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소련이 해체돼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 고려인 중에는 사업에 투신해 큰돈을 버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때도 고려인 공동체는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는 중요한 장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3개국을 순방 중이다. 경제 활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제영토 개척이 중요하다. 자원이 풍부해 성장 잠재력이 큰 중앙아시아는 매력적인 곳이다. 이른바 신(新)북방정책. 드라마와 케이팝 덕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큰 점은 우리 기업에 유리한 환경이다.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로 여기는 고려인들의 네트워크와 민족애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 중앙아시아를 여는 열쇠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전성철 논설위원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