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선장
6·25전쟁이 터지자 경북 영덕도 안전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가족과 선원들의 가족을 모두 태우고 울산 방어진으로 피란을 갔다. 그리고 다시 부산 영도로 내려갔다. 방어진과 부산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했다. 어선은 피란의 도구로서도 효용이 높았다. 육로로 가는 피란길은 사람도 힘이 들뿐더러 인민군에게 잡힐 우려도 컸지만, 바다를 통한 피란은 편하고 무엇보다 안전했다.
피란 중에는 통상 먹고살기가 그렇게 어려웠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어선이 있었으니 고기를 잡아 생계가 됐다. 내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 입시 시험을 보러 가서 영도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근처를 소상히 잘 알았다. 의아했다. 모두 피란 시절 영도에 거주한 경험 덕분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또 어선은 아랫대에게도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해상법을 전공하는 손자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해상법은 선박이 연구의 대상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선을 경험했으니 친숙하고 항상 자신감이 묻어난다.
해운업계에서 존경하는 선배 사장님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상선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선배의 아버지도 1945년 광복 전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시모노세키에서 작은 상선을 사와 고향 남해에서 연안운송을 시작했고 이것이 모태가 돼 선박회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내가 조부 얘기를 꺼냈더니 선배는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그날로 그 선배와 나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게 됐다. 할아버지의 어선은 그 선배가 나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는 좋은 수단으로 작용했다.
선대에서 25년 동안 가업으로 영위했던 수산업을 위한 어선들은 나름대로 역할을 다했고,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1950년대에 찍은 삼광호 사진 한 장이 손자인 나의 수중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선대의 가업이 수산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선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모두 잊혀 갈 것이다. 그렇지만 문자로 남기는 글은 영원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