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무상교육’ 시리즈 무상교복 이어 고교 무상교육까지… 정부, 재원마련 대책없이 강행 학력신장-교수학습활동 지원엔 시도교육청 평균 5.9%만 투자 무상교육으로 재정 압박 커지면 교육개선 투자액 더 줄어들 수밖에 세상에 싸고 좋은 건 별로 없어… ‘자두만한 복숭아’ 만들지 말아야
임우선 기자
마침 빨간 신호에 걸려 멈춘 차에서 노점 매대를 힐끗 보니 갓난아기 머리만큼 큰 복숭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크고 예쁜 복숭아를 1만 원에 팔다니! 전날 ○마트에서 복숭아 한 박스를 4만 원 넘게 주고 샀던 터라 구매욕이 동했다.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런데 웬걸, 상인이 매대 밑 구석에서 1만 원짜리라며 주섬주섬 꺼낸 것은 흡사 자두 크기를 방불케 하는 생기다 만 복숭아였다. 속으로 ‘속았네! 속았어!’를 외치며 빈손으로 차로 돌아왔다.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은 별로 없다는 단순한 이치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최근 논쟁이 일고 있는 ‘고교 무상교육’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고교 무상교육은 이전 정부인 박근혜 정부 때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재원 마련 방안이 뾰족하지 않아 무산됐던 사안이다. 현 정부는 다시 ‘2020년 고1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해 2022년 완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지난해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갑자기 이를 원래 계획보다 1년 앞당겼다. 교육계에서는 그때부터 이미 “총선용”이란 지적이 나왔던 터였다.
교육부 직원들조차 ‘장관 취임식 날 처음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된 고교 무상교육은 이달 9일 정부와 여당이 “올해 2학기 고3부터 시작하겠다”고 확정 발표한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무상교육에 쓸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부는 “고교 무상교육 도입을 통해 고교생 자녀 1명을 둔 국민 가구당 연평균 158만 원을 절감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생색내고 있지만 사실 그 돈은 그만큼 다른 교육 투자를 포기해야만 만들 수 있는 돈이다.
○ 지금도 교육의 질적 투자는 ‘미미’
교육은 국가의 그 어떤 분야보다 가격 경쟁력만큼이나 질적 수준 향상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높은 분야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예산은 질적 제고를 위해서는 거의 투자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교육예산은 얼마나 비생산적으로 쓰이고 있을까. 먼저 올해를 기준으로 보면 국가 예산 중 교육 분야에 책정된 돈은 총 74조9163억 원으로 전체의 약 15%를 차지한다. 이는 지난해보다 7조 원 가까이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교육부가 잘해서 예산을 더 준 것은 아니고 내국세의 20.46%가 자동으로 지방교육재정으로 교부되게 돼 있다 보니 세수가 늘면서 자연히 교육재정이 늘어나게 됐다. 물론 세수가 적게 걷힌 해에는 그만큼 교육재정도 따라 줄기 때문에 기존 연도에 진행하던 사업이 갑자기 중단되거나 교육청의 빚이 급증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무튼 75조 원에 이르는 이 천문학적인 교육 예산은 80%가 시도교육청으로 내려간다. 결국 각 지역 시도교육청을 운영하는 교육감들이 얼마나 현명하게, 생산적으로 돈을 쓰느냐가 한국 교육의 질을 좌우하는 셈이다.
그러나 시도교육청의 예산 집행을 ‘감시’하는 눈길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일부 지역에서는 “교육감이 모든 학교 입구에 500만 원짜리 전자동 신발 모래털이를 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 정도다. 그나마 교육부가 운영하는 지방교육재정알리미 사이트 정도가 보통 국민들이 시도교육청의 돈 씀씀이를 엿볼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학부모들의 관심이 가장 많은 교육의 질적 개선에 투자되는 돈은 미미했다. 학력 신장, 외국어 교육 등 교수·학습활동 지원에는 평균 5.9%의 예산이 투자됐고, 보건·급식·체육활동에 대한 예산 비중은 2.7%에 불과했다. 2016년 기준으로 서울과 인천은 교육과정 부문 투자 비중이 제일 적어 0.14%에 그쳤다. 서울은 경기와 함께 기초학습부진아 지도(0.03%) 부문에서도 전국 최저를 기록했다.
교육계에서는 교육감이 지역주민들의 선거를 통해 뽑히는 선출직인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질적 투자에 대한 비중은 줄이고 ‘학교 인테리어 개선’ 등 눈에 보이는 시설 투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한 대학 교육학과 교수는 “고교 무상교육으로 교육재정 압박이 커지면 그나마 무늬라도 유지해온 교육의 질적 투자가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 격차 커지는 포용국가의 역설
현재 정부가 한국에 고교 무상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고교 무상교육을 안 하는 나라는 우리뿐(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주호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는 “한국은 △민간기업 학자금 지원 △공무원 자녀 학비 보조수당 △저소득층 학비 지원 등을 통해 전체 고교생의 60%가량이 현재도 무상교육 혜택을 받고 있다”며 “고교 무상교육은 그간 민간기업이 부담해온 고교 학자금 일부를 정부 예산으로 대체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고교 무상교육을 둘러싼 논쟁은 과연 지금 한국에 필요한 복지가 ‘보편적 복지’이냐 ‘선별적 복지’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보편적 복지란 잘살든 못살든,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돈을 나눠주는 것이다. 선별적 복지란 어려운 계층과 낙후된 지역의 국민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서 사회적 격차를 줄이는 데 힘쓰는 것을 말한다. ‘포용적 국가 건설’을 모토로 하는 현 정부는 ‘모든 가정에 10만 원씩 아동수당’을 주거나 ‘모두에게 고교 무상교육’ 혜택을 주는 보편적 복지를 집중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 정책을 펴면 펼수록 사회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선별적 복지에 쓸 돈은 줄어든다. 정부에 예수와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펼칠 능력이 있지 않는 한, 재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으니 보편적 복지가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는 유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는 위정자의 자세일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학생 100명에게 10만 원씩 나눠주면 학생들은 그 돈으로 각자 피아노학원을 다니거나 외식을 할 것이다. 그러나 100명에게 나눠줄 10만 원을 모아 1000만 원을 만들고 이를 학교 음악교육에 투자하면 모든 학생이, 또 그 다음 해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모든 학생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거대한 공공의 가치를 무시하고 당장 개인의 눈앞에 던져줄 적은 효용의 과실로 환심을 사려는 것을 우리는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지금 정부는 1만 원만 강조하며 정상적인 복숭아 대신 자두만 한 복숭아를 내밀 심산은 아닌가. ‘모든 것엔 그 값이 있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임우선기자 ims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