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무의식 속 기억창고 여는 힘 가져 편곡 파격적일수록 대중들 반응은 싸늘 리메이크 때 곡의 시대 정서 보전하려해 옛 노래 그립다면 누군가가 그립다는 뜻 플레이 눌러 시간여행 떠나보면 어떨지
김이나 작사가
그렇다면 대중가요는 어떨까? 나는 1991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라고 하면 선뜻 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나왔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잡다한 추억거리를 늘어놓을 자신이 있다. 어떤 친구와 어디를 놀러 다녔는지, 어떤 패스트푸드점에서 무슨 메뉴를 즐겨 먹었는지, 그즈음 어떤 선생님의 수업시간이 가장 지루했는지까지.
대중가요는 이렇듯 개인의 무의식 속 기억 창고를 열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문학이나 영화는 마음을 먹고 시간을 투자해 감상하는 문화인 반면, 음악은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삶의 배경에 흐른다. 그렇게 삶의 곳곳에 묻어 있어 어떤 기억을 떠올렸을 때 특정 음악이 떠오르지 않을지언정, 특정 음악을 들으면 거기에 엉겨 있는 추억이 그물에 해초가 얽혀 나오듯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다. 최신 가요만을 찾아 듣는 취향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음악을 사랑하는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조금 ‘오버’하자면, 내가 소중하게 갖고 놀던 낡은 장난감이 버려지는 것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 어떤 명연주자의 연주도, 영민한 작곡가의 편곡도 나의 추억이라는 편곡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리메이크 곡을 접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도전적으로 틀을 바꾸고 세련되게 사운드 소스를 대체하는 경우보다, 해당 곡이 가진 시대적 정서를 보전하려 노력한 경우 기쁘게 감상할 마음의 준비가 된다. 나의 노스탤지어가 존중받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계절이 바뀔 때 나는 연둣빛 새싹과 단풍 같은 시각적인 변화로는 대체로 반가운 감정만을 느끼고, 비에 젖은 흙냄새나 낙엽 향기처럼 후각으로 느껴지는 변화로부터는 지난 추억이 불러온 애잔함 또는 아쉬움을 자주 느낀다. 이는 냄새와 기억을 처리하는 뇌의 방식 때문이라고 하니 기분 탓만은 아니겠다. 흘러간 음악에서 덜 세련된 사운드나 투박한 리듬 등은 어쩌면 그런 후각적 요소 같은 것 아닐까. 노스탤지어라는 것은 개인의 추억과 맞물린 세세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같은 것이니까.
유행 당시에는 좋은 줄 몰랐는데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이 노래 참 좋았구나’라고 느껴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추억으로 편곡을 하는 사람이란 뜻이겠다.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되살렸던 ‘토토가’는 음악이 우리의 추억에 어느 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음악은 존재감 없이도 우리 삶에 묻어 있을 수 있는 스킬이 있어 어떤 단서로도 바로 떠올릴 수 없는 지나간 기억을 바로 소환하는 능력을 가진다. 그래서 내게 음악은 마법 같다.
추억이 음악을 아름답게 편곡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음악은 추억을 그럴듯하게 편집해주는 역할로 보답한다.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을 떠올릴 만한 청춘의 서글픈 순간으로, 보잘것없고 시시했던 순간을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니 말이다. 모든 기억이 사진처럼 영상처럼 기억된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 아닐까 싶어 적당히 지난 시간을 버무려주는 음악과 망각이라는 속성에 감사할 따름이다.
“노래는 옛날 노래가 확실히 좋아.”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구나 해봤을 말, 당신도 예외 없이 읊어봤다면 그 노래가 흐르던 그때가 혹은 그때의 누군가와 당신이 그립다는 뜻일 수 있다. 지금 당장 플레이 버튼만 누르면 떠날 수 있는 시간 여행이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낭만인가.
김이나 작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