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2화> 전북 남원
3월 1일 전북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을 마친 주민들이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남원시 제공
1919년 4월 3일 전북 남원군 덕과면 길가에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胞諸君)’이라는 격문이 뿌려졌다. 나라를 빼앗긴 분노와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담긴 글이었다. 격문을 작성한 이는 덕과면장 이석기(당시 39세·건국훈장 애족장)였다. 일제 행정의 말단 책임자인 그가 엄혹한 식민 치하에서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독립을 외친 일의 파장은 컸다. 우선 덕과면 주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주민들이 만세 대열에 나서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이후에는 남원 4·4만세운동의 불씨가 됐고, 남원이 ‘의향(義鄕)’으로 불리는 디딤돌로 작용했다.
○ 식수기념일에 기습 시위
1919년 한강이남 최초의 만세시위가 3월 5일 전북 군산에서 일어난 뒤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리산 자락의 남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3월 초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가 천도교인들에 의해 전파됐다. 어떤 이들은 대담하게 면사무소와 헌병분견소 게시판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기도 했다. 이를 감지한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를 막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녔고, 그 퍼런 서슬에 남원군 주민들은 이렇다 할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3월을 넘겼다.
그는 당시 임실군 오수보통학교 교사였던 조카 이광수를 은밀히 불러 거사를 논의했다. 이광수는 3월 10일에 있었던 오수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를 주도한 교사로서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3월 25일 오수에서 또다시 대대적인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어린 학생들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은 오수면민들이 장날을 기해 벌인 것이다.
이에 이석기는 더 이상 거사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벌일 방법을 고심하던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이 ‘식수기념일(植樹紀念日)’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4월 3일을 식목일로 정하고 각 행정단위와 학교 등에 나무 심기 행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관청에서 연례적으로 하는 일이니 일제의 의심을 사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이석기는 3월 31일 저녁 친족인 이형기 이성기 이두기 이범수 등과 면서기인 조동선을 불러 비밀회합을 가졌다. 이들에게 4월 3일 각 가정마다 힘이 센 장정 한 명씩을 덕과면 신양리 뒷산 동해골(일명 도화골)에서 열리는 식수행사에 참석시키도록 지시했다. 또 사매면 3개 마을 주민들도 도로 보수를 명목으로 계명당 고개에 모이도록 했다. 2개 면 주민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벌일 계산이었다. 이석기는 각 면장들에게 보낼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이라는 격문도 작성했다.
○ 동해골에 울려 퍼진 만세 함성
동아일보와 남원청년회의소가 1974년 3월 1일 남원역 광장에 세운 3·1운동 기념비.
이후 이석기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 남원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조선독립의 열망은 모두의 가슴 속에 있었던 터라 행사 참석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시위대에 참여했고, 사매면에 있는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시위대가 율천리를 지날 무렵 이석기는 길가 초가지붕에 올라가 자신이 지은 격문을 큰소리로 낭독한 뒤 수십 장을 허공에 뿌렸다. 면장이 선봉에 서자 시위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계명당 고개에서 도로를 보수하고 있던 사매면민 300여 명도 같은 시간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합류했다.
덕과·사매면민들의 당당한 기세에 눌린 헌병주재소장은 곧바로 남원 헌병청에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총칼로 무장한 헌병들이 남원에서 차를 타고 출동했다. 면민들에게 피해가 생길 것을 우려한 이석기는 “내가 주동자”라며 시위대 앞으로 나섰다. 이석기를 비롯한 조동선 이재화 김선량 이풍기 이승순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했다. 이석기는 그해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 6개월로 형이 가중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남원군에서는 만세운동과 관련해 면장 6명과 면서기 7명이 사직원을 제출해야만 했다.
○ 무자비한 일제 총칼에 8명 순국
4월 3일 덕과·사매면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의 반향은 컸다. 현직 면장의 선창으로 울려 시작된 만세 소리는 군민들을 결집시켰고 다음 날 남원읍 북시장과 광한루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이튿날인 4월 4일은 남원읍 장날이었다. 남원읍장(邑場)은 남원군은 물론 서쪽의 순창·임실군과 남쪽으로 전남 구례·곡성군 주민들까지 몰려드는 큰 장이었다. 읍과 각 면의 지사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밤을 도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통해 각 부락에 거사계획을 전달했다. 헌병주재소에 감금됐던 이석기 등이 재판을 받기 위해 남원읍으로 호송됐다는 소식은 군민들을 더욱 들끓게 했다.
당황한 일제 헌병들은 초기엔 공포를 쏘며 위협했지만 시위 대열이 흔들림 없이 헌병청 앞으로 몰려들자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총탄에 쓰러졌고 길바닥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날 8명이 현장에서 순절하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다. 20여 명은 주동자로 체포됐다. 전북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상사가 발생할 정도로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지만 당시 주민들은 굴하지 않고 마을별로 장례비를 모았고 명정(銘旌)에 ‘의용지구(義勇之柩)’라고 크게 써서 만세운동으로 순절한 이들의 높은 뜻을 기렸다.(‘남원항일운동사’)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최초 만세운동지인 덕과면 사율리 동해골에 1999년 세운 남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1999년 ‘남원항일운동사’를 펴낸 윤영근 씨(82·한의사)는 “남원의 만세운동은 민중들의 자발적인 봉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민족생존이 위기에 놓였을 때 남원 출신 의사들이 벌인 항일 투쟁은 남원의 커다란 긍지와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 서울 탑골공원 ‘3·1운동 기념부조’에 새겨진 ‘남원의 삼순절’ ▼
아들부부와 어머니… 방극용 가족의 장렬한 죽음
‘의병장 후손’ 남양 방씨 일가 4명도 같은날 순국
‘의병장 후손’ 남양 방씨 일가 4명도 같은날 순국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3·1운동 기념 부조가 조각돼 있다. 3·1운동 당시 전국적으로 기억할 만한 10대 사건을 동판으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다.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남원 4·4만세운동이 새겨져 있다. 이른바 ‘남원의 삼순절(三純節)’로 불리는 방극용의 가족 이야기다.
방극용(당시 26세·건국훈장 애국장)은 평소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독립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한 청년이었다. 4월 4일 장날을 맞아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진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가까이 지내던 이웃과 친척에게 참여를 권했다. 그는 시위대 맨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헌병의 총탄에 맞고 절명했다. 남원 4·4만세운동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남편의 죽음을 들은 그의 아내가 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 방망이를 들고 달려와 헌병에게 대들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며느리의 죽음을 지켜본 시어머니는 “충용을 다해서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 아들 며느리의 원혼을 달래주시오”라고 부르짖은 후 자결했다. 세 사람의 장렬한 죽음은 남원군민이 보여준 애국 충정의 귀감이 되었다.
이날 만세시위 현장에서는 방극용을 비롯해 방양규 방진형 방명숙 방제환 등 남양 방씨 일가 5명이 순국했다. 같은 날 집안사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방극용 열사의 조카인 방태혁 씨(67)는 “남양 방씨 가문의 12대조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만오공 방원진”이라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문중 어른들이 시위대 맨 앞에 서다 보니 희생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남원시는 2017년 주생면 사계정사 입구에 ‘항일독립만세운동 순국 추모비’를 세우고 당시 순국한 남양 방씨 출신 5명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남원=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