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대표 기념일인 부활절을 맞은 21일 오전 8시 45분경(현지 시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등 3개 주요 도시의 성당과 교회 3곳, 호텔 3곳, 게스트하우스와 공동주거시설 등 모두 8곳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207명 이상이 숨지고 450명이 다쳤다고 미국 CNN방송 등 외신이 보도했다.
첫 폭발은 콜롬보 시내 코치키케이드 지역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발생했다. 이어 중부 해안도시 네곰보의 성세바스티안 성당, 동부 해안도시 바티칼로아의 자이언 교회, 콜롬보의 샹그릴라, 시나몬그랜드, 킹스버리 호텔, 콜롬보 남부 외곽의 트로피컬인 게스트하우스, 콜롬보 북부 교외 오루고다와타 공동 주거시설에서 동시다발로 폭탄이 터졌다. 부활절 예배를 위해 성당에 모였던 신도들이 속수무책으로 참변을 당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성세바스티안 성당의 현장 사진에는 신도석 위로 무너진 천장 잔해 사이로 희생자들의 핏자국 등이 담겼다.
사망자 중엔 중국 네덜란드 터키 국적자 등 외국인 35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BBC는 “호텔에 투숙한 외국인 관광객들의 희생이 컸다”고 전했다. 한국 외교부는 “한국인 관광객 및 교민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과격 무슬림단체 소행 가능성
스리랑카의 부활절 아침을 끔찍한 선혈로 물들인 대규모 연쇄 폭발은 종교 극단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계획한 테러로 추정된다. 가디언에 따르면 스리랑카 경찰은 21일 “용의자 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앞서 루완 위제바르데네 국방장관은 “용의자들은 같은 단체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사건 장소에서 자살폭탄 공격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배후 단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배후를 자처한 단체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테러 조짐을 열흘 전 파악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푸지트 자야순다라 경찰청장이 보낸 것으로 알려진 경고문에는 “급진적 이슬람단체 ‘NTJ(National Thowheeth Jama’ath)‘가 콜롬보 주재 인도 대사관과 주요 교회를 겨냥한 자살 폭탄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해외 정보기관이 알려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경고를 했는데도 21일 오전 8시 45분경 콜롬보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첫 폭발을 포함해 총 8번의 폭발이 스리랑카를 뒤흔들었다. 콜롬보 샹그릴라 호텔 폭발은 오전 9시경 ’테이블 원‘ 카페에서 발생했다. 이 호텔은 외국인 여행자에게 인기 높은 대형 호텔이다.
경찰당국이 집계한 사망자 수는 207명이지만 중상자가 많아 희생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 중 외국인은 35명이며 중국 네덜란드 터키 국적자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외교부는 “스리랑카에 1000여 명의 한국 국민이 체류하지만 확인된 피해는 없다”고 밝혔다.
현지 경찰은 피해 발생 지역 주변을 봉쇄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허위사실 유포를 막기 위해 소셜미디어 서버도 차단했다. 미 CNN방송은 “스리랑카 정부가 전 지역 각급 학교에 학생 안전을 고려해 24일까지 휴교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했다.
기독교의 주요 기념일인 부활절에 비보를 전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부활절 야외 미사를 집전한 뒤 “기도 중에 공격을 당한 현지 기독교 공동체와 잔인한 폭력에 희생된 모든 이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세계 주요 정상들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등도 동참했다.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도 트위터에 "스리랑카의 부활절 비극이 믿기지 않는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 충격에 빠진 스리랑카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 시리세나 대통령님이 하루 빨리 갈등과 혼란을 수습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라고 밝혔다.
스리랑카는 극심한 종교, 민족, 언어 갈등에 시달려온 나라다. 국민 약 2200만 명 중 74.9%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신할리족과 힌두교도인 타밀족(11.2%)의 반목으로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10만 명 이상이 숨졌다.
인도 언론 원인디아 등에 따르면 남부와 중부에 주로 거주하는 신할리족과 인도에 가까운 북부에 거주하는 타밀족의 핵심 갈등 요소는 언어였다. 스리랑카 정부는 1956년 신할리어를 유일 공식 언어로 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78년 두 언어를 모두 공식 언어로 지정했지만 불교 중심 국가를 추진하는 중앙정부와 이에 반발한 타밀족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내전은 1983년 타밀 무장단체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가 정부군 13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됐다. LTTE는 자살부대를 만들어 스리랑카 정치지도자 및 정부군을 공격했고 1991년 라지브 간디 전 인도 총리 암살, 1993년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전 스리랑카 대통령 암살 등의 배후로 지목받는다. 1987년 미국은 LTTE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1994년 집권한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전 대통령은 평화 협상을 시도했고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LTTE가 휴전을 거부하자 정부군은 2009년 군사력을 동원해 LTTE 무장반군을 무력 진압했다. 이때 정부군이 저지른 각종 잔학 행위는 인권 침해 및 인종청소 논란을 낳았다.
BBC 등에 따르면 21일 테러 원인으로는 민족 문제보다는 종교 갈등이 꼽힌다. 스리랑카의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등은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에도 기독교에 대한 공통의 적대감을 갖고 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기독교 국가에 연이어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 때문이다. 기독교 기념일인 부활절 예배 때 테러가 발생한 점도 이런 관측에 설득력을 더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