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심 기자의 낯선 바람]편집성 인격장애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망상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며 지역 민원센터 전화번호를 거칠게 눌러댔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누군가 동네 전봇대에 쓰레기를 또 몰래 버렸기 때문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남자가 민원센터와 게시판에 신고한 것도 여러 번. 시청 직원이 CCTV도 확인했지만 아직까지 범인을 찾지 못했다.
전날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한 뒤라 남자의 기분은 더욱 좋지 않다. 아내에게 분명 다른 남자가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남자에게 휴대전화 통화기록과 문자를 보여주며 억울해 했지만 거짓말이다. 그 따위 기록들이야 지워버리면 알 수 없지 않은가.
아내의 파렴치한 행동에 분노한 남자는 집안 물건을 닥치는 대로 내동댕이쳤다. 식탁에 차려진 점심도 엎어버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자신의 머리를 벽에 심하게 들이 받고 텔레비전 리모컨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악을 썼다. 남자는 이성을 잃었다.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참지 않고 그릇된 부당함에 맞서기로 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마다 그냥 넘기지 않고 따졌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 동료가 남자의 공로를 가로채서 승진할 때도, 동료와 상사에게 불공정함을 짚어가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상사가 남자를 차별하고 무시할 때면 동료에게 자신이 받은 차별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과 울분을 이해해 줄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남자 곁을 떠났다.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으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남자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답답함과 울분을 토해냈다. 직장생활에서의 부당함, 식당에서 받은 푸대접이나 서비스센터 직원의 불친절에 대해서도 글을 올려 원칙을 따져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더 외로워졌다. 내편인 것 같았던 가족마저 남자에게 마음의 문을 걸어 닫았다. 가족, 친구, 동료 모두 남자를 어려워했고 무서워했다. 남자는 철저히 고립돼 외톨이가 됐다.
이해할 수가 없다. 남자는 옳지 않은 일이나 경우에 어긋난 언행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울화가 치밀고 답답하다. 왜, 언제까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부정직하고 불합리한 세상이다. 아무리 원칙을 지키려고 해도 유별나다는 말만 돌아온다. 심성이 착했던 아내는 남자에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내마저 그에게 등을 돌리다니. 믿을 수 없다.
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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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TIP
타인이 항상 자신을 괴롭히거나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은 편집성 인격장애의 특징이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원한을 품고 화를 쉽게 풀지 못한다. 항상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 사소한 일에도 공격적이기 쉽다. 민원을 남발하거나 인터넷에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도 한다.
비현실적 피해의식이 심해지면 망상처럼 보일 때도 있다. 심해지는 집요함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도저히 못 말리는 사람으로 생각해 멀리하거나 피한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외로움으로 피해의식은 더욱 커지고 고소광이나 민원왕이 돼 무너진 자존감을 지키려 한다.
정찬승 융학파 분석가·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