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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유재동]공무원에게 규제개혁을 맡겼을 때 생기는 일

입력 | 2019-04-24 03:00:00


유재동 경제부 차장

“원격진료든 뭐든 우리도 하고야 싶지. 근데 된 적이 있냐고. 맨날 싸움질만 하고. 어차피 안 될 걸로 끙끙 앓느니 되는 거라도 먼저 해야지.”

“또 그런 게 한 방에 되나. TF도 가동하고, 시범사업부터 해보고, 그러고 나서 ‘이런 게 있습니다’ 해야 하지 않겠어?”

취재를 하다 보면 상대가 너무 솔직히 나와서 당황할 때가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규제개혁을 맡았던 고위 공직자 K 씨가 그랬다. 당시 그가 늘어놓은 넋두리엔 관료가 규제를 다루는 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절대 나서지 않고 정도껏 하기, 핵심은 놔두고 쉬운 일부터 하며 시간 벌기, 그리고 ‘해봤자 되겠느냐’는 패배주의…. 그해 서비스업 대책은 맹탕이었다.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규제개혁 쇼’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임기 초에 대통령이 나서서 규제완화를 역설하면 당장에라도 암덩어리 같은 규제가 혁파되고 새 세상이 열릴 것만 같다. 하지만 이는 잠깐이다. 관련 부처가 모여 회의를 열고 법안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이익단체의 반발과 정쟁이 불거지며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공무원들은 이때부터 책상 위 달력을 넘겨보기 시작한다. 정권이 저물어갈 즈음 일단 뭐든 뭉개고 보는 본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회전이 5년마다 무한 루프로 반복된다.

20년째 ‘시범사업’만 하고 있는 원격진료가 그런 사례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부터 추진한 이 과제는 이후 네 번의 정권 교체를 거치는 동안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국내 현실은 이렇게 초라한데 역설적이게도 해외에선 우리에게 엄지를 치켜세운다. 중앙아시아 순방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의사에게 원격진료를 받은 우즈베키스탄 환자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원격의료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도 개선되길 바란다.” 우리 기술의 혜택이 자국민이 아닌 딴 나라 사람에게 가는 현장을 본 대통령의 심정은 어땠을까. 같은 날 한국에서 총리는 이런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린 듯 “공직자들이 규제에 대한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기관장이 챙겨라”라고 질책했다.

이쯤 되면 대통령도, 총리도, 기관장도 알아야 한다. 공무원들은 최소한 규제 문제에 있어서는 국민의 이익보다 자기 안위를 위해 움직인다. 규제 샌드박스도 취지는 좋지만 자칫 관료에게 또 하나의 칼자루를 쥐여주는 꼴이 될 수 있다. 혜택을 주는 권한이 여전히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입맛에 맞는 업체를 골라 줄 세울 수도 있고 눈앞의 성과를 위해 숫자만 늘릴 수도 있다. 샌드박스가 소꿉장난 놀이터가 되지 않으려면 공유승차·숙박, 원격의료, 빅데이터 같은 ‘메기’를 대거 투입해야 하지만 정권은 주저하고 있다. 또 잘못된 공회전의 반복이다.

규제개혁이라는 골치 아픈 업무를 ‘무난하게’ 통과한 K 씨는 이 정부에서도 비교적 순항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기회주의적이라거나 고리타분하다고 욕할 생각은 없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관료는 정치인, 이익집단과 함께 규제를 공고히 하는 ‘철(鐵)의 삼각형’을 이룬다. 규제 혁파는 이들만이 할 수 있지만 그게 이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